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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결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우선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손 치더라도 형이상학적인 비유, 상징이 꽤 많고, 다양한 인물들의 심리와 사건의 중의성 등을 설명하기 위해 시점을 제각각으로 잡은 점 등이, 비유하자면 이 작품의 이해라는 산정상을 오르는 데, 딱 구부능선쯤에서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을 만난, 그런 좌절감을 선사한다.
이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읽기 3편은 그렇게 십 프로쯤 모자란 글이 될 테다. 나는 아직 완등을 못했다, 이 작품을. 어떤 느낌인지 알고 무엇을 말하는 지는 안다. 그러나 속속들이 무엇을 상징하고 주인공의 행위나 말 속에 녹아있는 심리가 정확히 무엇인지, 작가는 대체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지, 정확히 안다고는 말 못한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 우선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징, 표현, 내용에 대한 해석은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다. 누군가의 주장과 일치한다면 순전히 우연이다. 혹, 그게 절대 아니니, 가르쳐 주고자 한다거나, 다른 의견을 보태고 싶다면 댓글이나 메일로 언제든지 의견 주시기 바란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
양면을 다 가진 존재다.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특수한 물체다. 따지고 보면 누구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누구도 온전히 들어갈 수가 없는 세계다. 언제나 대립하는 상황인 현실세계와는 다른 세상이다. 계급이 대립하고 그 차이는 안팎을 나누고 배제와 차별의 근거가 된다. 작품속에서 난장이와 거인의 세계는 화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난장이는 화해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은 난장이가 바라는 이상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차별과 배제가 없는 동등한 세상. 함께 존재하는 것을 용인하는 세상 말이다.
굴뚝청소.
두 소년이 굴뚝을 청소하는 행위는 일반적인 노동을 상징한다. 한 아이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고 한 아이는 안 묻어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에 영수와 윤호, 혹은 영수와 경훈이 함께 굴뚝을 청소하러 올라갔다면 영수만 그을음이 묻어서 내려왔을 확율이 높다. 소년들의 계급이 달랐던 것이다. 한 소년은 다른 소년을 감시하기 위해 사용자로서 올라갔을 가능성이 높다. 굴뚝의 주인에게 돈은 누가 받으러 갈까? 필자의 생각으론 그을음이 묻지 않은 소년이 가서 받을 것이다. 수학선생의 말은 함께 일하고 같이 씻고 나눠야 옳다는 말로 해석한다.
벽돌공장과 벽돌공장 굴뚝.
필자는 벽돌공장 굴뚝에 오른 난장이의 대목에서 체 게바라가 남미의 구리광산에서 올랐다는 굴뚝을 떠올렸다. 어떤 계시의 공간으로 읽었다는 말이다. 벽돌공장은 난장이의 집에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가깝다. 길 건너 신애의 집에서도 보인다. 부자집, 윤호의 삼층집에서도 개천 건너편으로 보인다. 계층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상징으로써의 굴뚝. 그것이 무엇일까? 벽돌공장은, 철거민과 집없는 도시빈민의 삶을 그린 이 작품에서 생뚱맞게도 나타난 집짓는 재료다. 함께 사는 커다란 공동체의 집을 짓고 싶었던 작가, 혹은 난장이의 꿈이 아니었을까? 이 굴뚝을 허는 날 발견된 난장이의 주검은 그래서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
신애.
신애는 빈민가 바로 앞 동네에 사는 시민이다. 양심적이고 온정적이다. 때론 불의 앞에 생선칼을 휘두를 정도로 과단성도 있다. 신애는 시민을 상징하는 등장인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스스로 난장이라 이르는 것에서 시민이 가져야 할 계급성에 대해 본능적으로 자각한 사람임을 짐작케 한다. 신애의 온정이야 말로 이 쓸쓸하고 서글픈 작품에서 만난 최고의 안식처였다. 조금은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나, 신애라는 인물을 만들어준 조세희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윤호.
윤호는 율사의 아들이다. 법률과 법률가는 부정한 세상의 수호자다. 최상위 포식자에 기생해서 사는 기득권이다. 그러나 윤호는 현실의 부당함을 깨닫고 저항하기 시작하는 인물이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발전적인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이 인물을 통해, 한 사람은, 출신이 아니라 의식으로 판단해야 함을 일러준다. 계급적 적대감만 조성하던 교조주의자들에게 넌지시 사람이 먼저다, 라고 이르는 듯 했다.
은희.
윤호가 사랑한 인물이다. 백지처럼 아무것도 모르지만 윤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 은희의 아버지는 설정상, 윤호의 아버지보다 계급이 높은 율사다. 윤호가 그녀를 멀리하거나 또는 품거나 하는 과정은 변증법적으로 보인다. 은희를 품은 윤호가 호텔을 나서면서 은강시를 바꿀 연대조직을 만들 결심을 하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낮은 곳에 단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수돗물.
물질대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낮은 곳을 채워야 위도 찬다. 자본주의는 상위 몇 프로가 독식하는 기형적 구조다. 아래는 토대다. 토대가 무너지면 세상은 온전히 서 있기 힘들다. 필자는 키 작은 난장이가 키 작은 수도꼭지를 만들 때, 어떤 전율을 느꼈다. 물은 낮은 곳을 채우고 흐른다. 사회 정의는, 낮은 곳을 채우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칼과 수도.
부정한 행위, 가령 쓸데없이 돈을 들여 우물을 파거나 모터를 달아 남의 물을 빼내는 행위라든가, 부당한 행위, 가령 우물사업자가 수도꼭지를 바꿔다는 난장이를 핍박한다는가, 이런 행위에 저항하면 정당한 댓가를 찾을 수 있다는 웅변으로 들렸다. 신애가 건달에게 휘두른 칼을 필자는 시민, 노동자, 빈민의 저항으로 보았다.
육교.
어떤 현상은 그 속에 있을 때보다 잠시 거리를 두고 볼 때, 더 잘 보인다. 도심의 번잡함에서 잠시 육교 위로 오른 신애가 떠올리는 동생과 동생친구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가족까지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 우리는 먹고 살아야지, 혹은 처자식 굶겨서야 쓰나, 이런 말로 소소한 부정, 가벼운 변절을 당연시 한다. 그것이 서문에서 작가가 말한 혁명이 필요한 때, 혁명을 좌절시킨 요소가 아닐까?
낙원구 행복동.
난장이의 마을은 낙원구 행복동이다. 지독한 역설이다. 어떤 우상이나 상징, 프로파간다에도 쉬 속아서는 안 된다는 역설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진실인가? 행복하지도 않은 낙원에서 난장이는 집도 없이 벽돌공장 굴뚝 안에 떨어져 죽었다.
장님.
본질적인 문제를 깨닫지 못하거나 사랑을 모르는 비인간적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은강시에 유독 장님이 많다는 얘기는 환경오염문제나 산재가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탐욕에 눈이 멀거나 혹은 작은 위협이 무서워 세상을 바로보려 하지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가 더 크다.
수학선생.
가장 논리적인 사고를 가르치는 학문이 수학이고 그 수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수학선생이다. 왜 작가는 그 많은 교과목 선생들 중, 수학선생을 골라 등장시켰을까? 그것도 플롤로그에 해당하는 첫 편과 에필로그에. 이 이야기의 현실함수를 풀고 싶었던 걸까? 수학선생은 그의 논리로도 현실문제를 풀지 못해 우주로 간다고 말한다. 이 현실이 너무 모순투성이라 풀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니었는지. 수학시간의 이야기에 삽입된 꼽추와 앉은뱅이의 이야기는 가슴이 쓰린 이야기다. 수학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난장이의 꿈처럼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만 풀 수 있는 것인 지도 몰라.
반딧불이.
절망의 순간에 나타난 작은 불빛은 어쩌면 별빛이었는 지도 모른다. 꼽추가 발견한 반딧불이는 회복과 희망의 언어다. 이렇게 삭막한 세상이지만 어딘가 죽지 않고 작지만 어둠을 사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씨가 졌다던 반딧불이 돌아온 이야기는 사랑과 꿈과 희망을,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작가의 속삭임이였다. 그리고…… 꼽추는 죽었을까…….
가시고기
경훈의 꿈에 나타난 가시고기는 뼈만 남은 물고기다. 이 물고기가 경훈이 친 그물로 몰려드는 모습은 괴기스럽다. 가시고기는 이미 착취자들에게 살점을 다 뜯긴 노동자, 빈민을 상징한다. 그들이 경훈의 살점을 찢는 것은 빼앗긴 것을 되찾는 형상이다. 경훈이 스스로 약해졌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영수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일정 그들에게 동의하는 부분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우주여행
이 작품에 나오는 이상향 같은 것이다. 전편에 두루 나온다. 우주여행은 완전한 세계로 가는 길이며 그 끝에 있는 혹성이나 달은 이상향이다. 현실적으론 이를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난장이
어떤 시대든 소외받고 핍박 받는 계층이 있다. 난장이를 비롯해 꼽추, 앉은뱅이는 그런 계층을 상징한다. 그래서 이들은 변화를 꿈꾼다. 불온한 자들인 것이다. 몸은 왜소하지만 감히 상상하기 힘든 세상을 꿈꾸는 거인. 우리의 모습이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쏘아올린 작은 공
난장이가 대체 무엇을 쏘아올렸다는 것일까? 적어도 이 작품에서 난장이를 기억하는 모든 인물, 그리고 이 작품을 읽은 사람은 짐작할 지도 모르리라. 그 공. 통통 튀고 있는가, 어디 물에라도 퐁당 빠져서 파문을 일으켰는가, 아니면 저 멀리 날라가 보이지도 않는가? 아니면 어떤 어두운 장벽을 뚫어, 작은 빛 하나, 반딧불이처럼 천장에 박아놓고 갔는가? 그것이 어떤 형태의 무엇이었는 지는 각자만 알 것이다. 아니, 각자만의 것이다. 난장이는 분명히 공을 쏘아올렸다. 그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편은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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