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728x90
    반응형

    도스토옙스키의 장편, ‘죄와 벌은 일어난 사건, 서술하는 전체기간에 비해 상당히 긴 소설이다. 이 소설이 어떻게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아직도 수많은 지성들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하는 소설로 꼽는 이유는 각자 독자가 찾고 확인해야 할 제각의 몫이다.(이 소설이 그런 가치가 있다는 쪽에 필자의 의견을 보태면서도, 소개하는 입장에서 약간의 책임회피도 하고자 하는 발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라는 청년은 지적인 동시에 우울한 사람이다. 그는 어떤 편집증적인 증세를 보이며 두 사람을 살해한다. 이 소설은 스릴러나 추리물이 절대 아니다. 그래서 소설 도입부에 라스콜니코프가 살인을 저지르고, 사건 이후를 집요하게 다루는 것이다.

    살해까지는 어쩌면 간단한 서사이다. 그가 느끼는 긴장, 갈등 따위는 아무렴 어떤가.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하는 것들이다. 주인공이 느끼는 공포, 신경쇠약, 과민반응 등은 일면 독자에게 의아함을 선사한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른 자가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 나약한 자인가?

    라스콜니코프는 명문대학 법학부의 휴학생으로 나름의 사회적 이론을 이미 스스로 정립한 사람이었다. 함정은 여기에 있었다. 그가 정립한 이론은 본문의 여러 장면에서 설명되는데, 간략히 보자면, 모든 사회적 변혁을 이끈 비범한 자들은 그렇지 않은 평범한 자들을 재료로 사회를 변혁한 당대의 범죄자라는 것이 그 요체다. 인용되는 사람들은 나폴레옹 등이다. 결국 라스콜니코프는 젊은 열정과 지성으로 스스로를 과대 포장해 스스로가 비범한 자인가, 아닌가를 극단적인 범죄 실험으로 시험한 것이었다. 스스로 비범한 자라고 인지, 오해했다고 보는 것이 적확하다.

    물론 그가 죽인 노파는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전당포를 운영하며 고리를 붙여 막대한 이익을 편취하는 자로 마땅히 없어져야 할 존재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범죄를 스스로 감내해 내지 못한다. 전당포 노파만 죽인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착취당하던 착한 이복동생까지 죽인 것도 그 이유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비단 그 이유뿐 만은 아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그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였고, 자기 이론 또한 완벽하거나 딱히 탁월한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비범한 자가 아니었던 게다. 그래서 그는 편집증적으로 그 사건이 희화되거나 범인이 비난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감옥에서도 자신이 살해한 것에 대한 죄는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책임(?)의 무게를 감내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고 그것이 죄라면 죄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젊었다. 8년의 형기는 죄의 무게에 비해 가벼운 것이었다. 그래서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했다는 표현은 아직은 설익은 삶이지만 더 나은, 혹은 다른 삶으로의 이행이 충분히 가능한 주인공의 남은 삶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것을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일 테지만.

    주인공은 그 노파를 죽이기로 결심하면서 어떤 다른 이론으로도, 혹은 문제로도 그 살인의 동기를 스스로는 막지 못했다. 이것은 정, , 합의 변증법적인 논증의 세계다. 이론의 세계며 실로 공상 속에서만 가능한 완벽한 세계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의 발전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이 이처럼 분명하다면, 비범한 자로서 시행하지 않을 재간이 없는 것이 아닌가? 숱한 혁명가들이 부나방처럼 죽음을 알고도 자기 신념을 위해 몸을 던져온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그는 그 일을 시행하고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신경쇠약이 찾아들고 스스로 단서를 흘리는 오류를 범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말처럼 크게 될 인물이 못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완벽하지 못한 이론, 완벽하지 못한 심성으로 비범성에서는 빗나갔지만, 겨우 약관 스물세 살이었다. 그의 앞에는 많은 삶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가 살인을 최초로 고백한 소냐는 어린 창부다. 집안의 가난에 길거리로 나선 이 어린 소녀와 라스콜니코프의 사랑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소냐는 부조리한 세상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살아가지만 라스콜니코프는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측이다. 소냐가 기대는 것은 깊은 신앙과 가족애다. 라스콜니코프는 신앙도 버리고 가족마저 버리려고 한다. 그의 옥바라지를 하는 소냐. 그들의 사랑이 필연적인 이유는 그렇게 어울리고 살아야하는 것이 현실세계인 고로.

    , 인간 사회는 이 두 사람의 중간쯤에서 발현하고 맺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죄와 벌, 두 자간의 간극 그 중간. 그곳이 인간의 삶이 놓인 자리가 아닐까, 싶었다. 발전을 도모하며 오류를 쌓고 또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극복해 가는 과정에 놓인 것이 인간여정의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