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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을 그리고 싶다, 라는 욕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굳이 그림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겠다. 글을 쓴다든가, 음악을 한다든가....... 무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싶고, 생의 좀 더 본질적인, 내가 가지고 태어난 생래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는 욕구는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봄직한 꿈이다. 만약에 그런 것이 실제로 있다고 한다면 말이다.

    내가 나의 그런 것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할까? 아이, 가족, , 명예.......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달과 6펜스의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떠날 수 있을까? 아니 그것만을 위해 남은 온 생을 바칠 수 있을까가 정확한 표현이겠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누구에게나 냉소적이며, 일반적인 도덕률, 예의 따위 완전히 무시한다. 사회적 통념 따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오로지 자신이 발견한, 그 시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 생래적인 자신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친 인물이다.

    하지만 그 전에는, 그도 학업, 취업, 결혼, 가정생활 모두, 비록 조금 따분해 보이는 인물일지는 몰라도, 잘 해내던 어엿한 장삼이사였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진정한 삶의 목표를 발견하자, 그것에 완전히 몰입해 주변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철면피, 독설가, 냉소주의자로 극적인 변신을 한다. 그런 냉소 속에는 자기 일신의 안위와 생명까지도 포함된다. 그런 동력, 과단성이 평범과 위대성을 가르는 구분점이 아닐까 싶다. 평범한 우리는 그렇게까지 철저히 본질적 가치를 추구할 수 없다, 그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왜일까? 그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확신을 한다손 쳐도 살아오며 기본적인 질서에 편입된 자신의 입장, 처지를 완전히 무시하기 또한 어렵다. 역시나 세속적인 가치인 '성공' 따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테다. 그래서 찰스 스트릭랜드의 비범성은 다만 타고난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실천한다, 라는 과단성이 바로 비범성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선후관계는 어떤 것일까? 그것이라 믿고 생을 다해 바치는 목적이 본질적 가치가 되는 것일까? 본질적 가치가 있어서 그런 행동이 가능한 것일까? 여기에는 객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스트릭랜드만 해도 생전에 그 누구도 그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제목의 구분으로 보자면 6펜스의 세계는 외려 그를 배제시켰다. 그가 안정을 얻은 곳은 타히티라는 때 묻지 않은 남태평양의 외딴 섬이다. 이곳은 아마도 달의 세계일 것이다.

    그가 죽고 평단의 인정을 받으면서 그가 생을 걸고 추구했던 길, ‘그림이 다시 6펜스의 세계로 환원되는 아이러니는 사뭇 서글픈 풍경이다. 속물적인 아내는 떠난 남편이 인정받자, 함께 살았던 시절을 포장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그의 진짜 마지막 대작은 그와 함께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가 눈이 먼 상태에서도 끝까지 그렸던 방안의 벽화야 말로 진정 그가 마지막으로 불태운 예술혼이 오롯이 담긴 대작이자, 그의 미적세계의 완성이 아니었겠는가. 그것을 순수한 타히티 토박이 아내, 아타에게 태우라고 한 것은 결코 환속하지 않으리라는, 6펜스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결국 그의 의도대로 우리는 그 벽화에 값을 매길 수가 없었다. 그 그림은 그렇게 지워짐으로써 완성된 것이다. 잡을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완전한 아름다움, 색과 선의 세계. 그는 문둥병으로 눈이 멀었지만 그 작품을 훤히 보고 있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눈먼 맹인은 그의 작품, 그의 기벽을 사갈시한 6펜스 세계의, 그렇다, 우리세계의 다른 이름은 아니었을까?

    자신만의 이상을 찾고 그 길에 온 생을 던질 수 있었던 찰스 스트릭랜드가 이런 의미에서 완전히 행복한 사람이었다. 부귀와 영화 따위의 돈으로 환원되는 것이 결코 목적이 아니었던 순수한 예술. 다다를 수 없지만 지향할 수 있는 가치, 그는 지금 아마도 독자들의 마음속 달에 살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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