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서적 / / 2019. 11. 22. 12:44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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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 이 두 권의 책은 최근 독서가들 사이에서 소위 꽤 ‘핫’한 책으로, 유발 하라리라는 젊은 학자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책들이다. 이 책들이 담고 있는 다방면에 걸친 방대한 지식과 그 지식들을 관통하는 저자의 예리한 통찰력은 이 책의 가장 큰 볼거리다. 

인류의 역사와 미래까지 예측하는 책이 사실 얇을 수가 없다. 이 두 권의 책은 그래서 제법 두텁다. 하지만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을, 그 주제를 보자면 턱없이 얇은 책임도 분명하다. 여기서 저자의 영리함이 필요한 것이다. 이 두 책은 사실 몇 가지 핵심 키워드로 잘 꿰어진 목걸이와 같다. 그 핵심 키워드로 내가 뽑은 것은 ‘상호주관적 실재’와 ‘호모 데우스’, 이 두 가지다. 

 

1. 상호주관적 실재와 호모 데우스

 

★상호주관적 실재

 

‘사피엔스’는 어떻게 인류가 세상의 지배적인 지위에 오르게 되었는가를 분석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인지혁명이다. 인지혁명은 언어, 문자로 대표되는 인간 뇌 속의 일련의 자그만 진화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우리를 가상의 질서로 이끌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차기작인 ‘호모 데우스’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게 되는 개념인 ‘상호주관적 실재’가 이 언어와 문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도구와 뛰어난 지능만으로 세상의 패권을 장악한 것은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왜냐면 실제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전파가 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또 거대한 댐을 짓기 위해 협력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농업생산력은 기실 불가능하다. 이렇게 힘과 힘을 연결하고 지식을 축적하는 힘은 대규모 협력에서 나온다. 이런 대규모 협력은 어떤 질서를 통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초월적인 존재, 신, 혹은 국가 등의 ‘상호주관적 실재’인 것이다.

 

첫 번째, 상호주관적 실재, 신(종교).

신은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을 해석해 주고 은혜를 주고 또 벌을 줌으로써 사피엔스를 협력하게 만든다. 농업혁명이후 나타난 유일신들은 농경민족을 축복하고 신의 뜻을 받드는 자로서 사피엔스를 존엄하게 만들어준다. 이 가공의 실재가 대규모 협력의 출발이다.

 

두 번째, 상호주관적 실재, 국가.

민족단위의 발생으로 국가가 발생하고 강한 국가는 제국이 되어 주변을 통합해 나가면서 협력의 덩어리는 확대된다. 그 속에 종교, 문화가 배제, 혹은 융합되면서 같은 상호주관적 실재, 국가를 믿고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세 번째, 상호주관적 실재, 돈.

신뢰라는 것을 바탕으로 먹을 수도 없는 종잇조각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으로 상업적 거래, 재산증식 등에 혁명적 변화가 발생한다. 

 

이런 의식이 어디서 발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진화의 과정에서 어떤 변이가 일어났고 그 변이가 동물, 혹은 형제, 침팬치와의 결정적 차이를 만들었다. 대규모 협력과 네트워크는 과학혁명에 이르러 한 번의 변태를 더 겪는다. ‘무지’를 발견한 것이다. 종교가 무엇이든 다 아는 ‘신’에 의지했다면 ‘무지’의 발견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신의 자리는 사라지고 대신 불변의 자아, 개인을 믿는 자유주의, 인본주의가 자리잡게 된다. 여기까지가 현재까지에 대한 저자의 분석이다. 

 

네 번째, 상호주관적 실재, 자아.

지금, 생명공학, 생물학은 걷잡을 수 없는 영역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유일한 자아란 사실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자의식마저 상호주관적 실재, 즉 상상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일련의 알고리즘을 따르는 유기체적 알고리즘 덩어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피엔스가 스스로를 존엄하게 여기는 자아는 해체되고 인본주의도 설 자릴 잃게 된다. 

 

상호주관적 실재는 ‘사피엔스’의 힘이자 특징이다. 대규모 협력을 발전시킨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에는 목적도 끝도 없다. 그래서 ‘사피엔스’가 진화의 최종 목적지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어떤 진화를 겪게 될까? 저자는 최초의 ‘지적 설계’에 의한 진화를 보게 될 지도 모른다고 이야기 한다. ‘호모 데우스’의 탄생인 것이다. 

 

★호모 데우스

 

‘호모 사피엔스’이후의 인류를 이르는 말이다. 초인이다. 날아서 다니거나 눈에서 광선을 쏘는 존재는 아니다. 엄청난 인지능력과 창의력, 그리고 죽음을 극복한 존재일 테다. 이런 존재가 반드시 유기체일 필요는 없다. 이 존재는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되어 사피엔스들을 지배할 것이다. 

 

이 개념은 다소 추상적이다. 어떤 추론에 의해 가능성들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과 논리적 추론에 의하면 타당한 가설이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데이터 덩어리들을 스스로도 모르게 만들어내고 있다. 페이스북의 연구에 의하면 ‘나’의 좋아요 300개만 분석하면 내 배우자보다도 더 정확하게 ‘나’의 정치적, 사회적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정보 패턴, 즉 알고리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어마어마한 정보들이 통합되고 분석, 소비되는 곳이 되었다. 이런 전체적인 알고리즘을 분석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 지금의 어떤 단위의 조직도 그것을 할 수 없다. 알고리즘은 알고리즘 자체가 제어하고 있을 뿐이다. 사피엔스는 그 속에 조그만 지엽적 역할들만 분할하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 인간의 어떤 존엄이 필요할까? 

 

인지능력의 획기적 도약으로 새로운 개체가 탄생해서, 혹은 알고리즘 자체가 호모 데우스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런 세상의 변화는 ‘호모 사피엔스’를 그 지엄하고 존엄한 자리에서 몰아낼 것은 분명하다. 현실은 따라주지 못했지만, 다만 선언 속에서나마 ‘인간은 평등하고 똑같이 존엄성을 가진다’라고 주장했던 시대마저와도 결별하게 될 거라는 말이다.

 

2. 그렇다면 나는?

 

★나는 맹종하지 않는다

 

유발 하라리는 분명 세계적 석학이며 뛰어난 문필가다. 그러나 그렇다고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의 분석들은 통렬하고 날카롭다. 그러나 보지 못하는 부분들, 분명 그 자신의 편견 때문인 듯 보이는 부분들도 분명 있었다. 특히 아랍권이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편견은 혐오에 가까웠다. 세상을 진화의 연속으로, 변화만이 유일한 진리라 주장하면서 특정 사회체제에 혐오를 드러내는 것은 통일성이 결여된 것이다. 특히,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반대 개념으로, 사회주의를 독재로 해석하는 부분은 더 동의하기 어려웠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반대말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물론 사회주의적 속성을 많이 받아들인 자본주의지만, 이를 사피엔스 역사의 최종단계로 보는 것도 무리가 있어보였다. (자본주의가 자유주의의 동의어로 쓰이는 지점도 혼란스러웠다.) 역사의 매듭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결정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라고 스스로가 말했다. 현 시점에서 자본주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결정론적인 접근법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변화만이 진리다.

 

호모 데우스라든가, 이런 것 자체가 ‘사실적 진술’이지 객관적을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하라리는 어쩌면 이것을 하나의 교의로 세우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만 필자는 조금 믿음이 부족한 유발 하라리의 팬이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유발 하라리는 영리하게도 [호모 데우스]의 마지막 장에서 다른 상상도 창의적으로 해보자는 의미에서 이 책의 관점을 제시했다고 했다. 정말 옳은 말이다. 우리는 다가올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력한 ‘상호주관적 실재’인 신이 재림한다든가, 우리 민족만이 선택받았다는 관념이 더 이상 우리 속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모 데우스’나 데이터가 지배하는 알고리즘의 세상 또한 마찬가지다. 매번의 우연한 선택들이 우리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 인간이 역사의 창조주라면, 역사의 물길은 인간집단이 가장 강력하게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것이다. 

 

방대한 데이터들을 우리 ‘사피엔스’가 일일이 처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 쏟아지는 정보들을 취사선택할 능력과 힘이 아직은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가령, 지금 미국이 이북을 공격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페이스북에 그것을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글을 게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일반 시민이 그럴진대 정책권자, 로비스트, 기업들은 어떨까? 기억해야 할 부분은 대규모 네트워크가 미국의 공격임박을 단 몇 초 만에 남극의 세종기지 대원에게까지 알려줄 거란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능동적 행위 또한 더 빨라지고 대규모 협력 또한 국경을 넘어서는 초대규모가 되지 않을까?

 

2007년 미국소 수입반대 촛불시위와 지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위는 SNS에 힘입은 바 크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인터넷이 큰 역할을 한 선거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 당시의 선거였다. 인터넷 같은 연결망은 엄청난 데이터제국을 구축했지만, 그 속에서 인간들 또한 대규모 협력을 구축했다. 이 속에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여전히 인본주의적 가치들이다. 노동자의 인권, 여성의 인권, 아동의 인권, 시리아난민의 인권 등.

 

만약 우리가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호모 데우스’를 상호주관적 실체로써 다가올 미래의 위험으로 간주하고 저항한다면 어떻게 될까? 인류는 지적설계와 지적진화를 동시에 거부한 최초의 종이 될까? 

 

필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의 최종 목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선택권과 힘이 아직 우리에게 있다고 조심스레 낙관 아닌 낙관을 가져본다. 필자는 아무래도 ‘사피엔스’임으로.

 

★일독을 권한다

 

인간의 과거와 미래를 들여다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둘 다 우리가 많은 지식을 축적해야만 가능한 일들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일련의 추리력이 동원되는 지적 게임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런 쪽에 프로다. 천재적이다. 꼭 한 번쯤은 읽어보길 권한다.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에겐 꽤나 불쾌한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인본주의의 가치들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본주의자들에게도 불편한 책이다. 

 

불편하다고 겨울이 없어지지 않으며 강바람이 잠들지도 않는다. 가장 필요한 것은 현실을 목도하는 것이다. 바람과는 다르게 우리는 현재, 역사 진행의 변방에 있는 장삼이사들일 뿐이다. 스스로가 존엄하다 여겨도 우리는 우리 국가의 전쟁을, 그리고 일어나는 징집을 피할 수 없다. 존엄한 우리는 매일 산업현장에서 죽어나가고 사무실에서 상사의 모욕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필자는 유래없는 연결망 속에서 오히려 변방의 외침이 중력을 얻고 있다는 느낌을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촛불시위 등을 상기해 보시라.

 

맹신하기 위해 책을 읽지 않으면 어떤 책이든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우상 같은 또 다른 ‘상호주관적 실재’를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되었고, 과학혁명은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가?’ 하는 화두 하나만 건져내도 엄청난 소득이다. 과거는 굳어 화석이 되었지만 미래는 아직 빚지 않은 물컹한 찰흙이다. 누군가들은 계속 자신들의 뜻대로 이 찰흙을 주무르고 있다. 지켜보고, 또 촘촘한 연결망으로 참여도 해보자. 무엇이 될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나도, 실은 하라리도 잘 모른다. 과거, ‘무지’의 발견은 ‘과학혁명’을 낳았다. 지금, 우리가 함께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또 다른 미래를 만들 만큼 강한 힘이 될 수있을지, 그 누가 아랴? 해서 강하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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