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 / / 2020. 4. 15. 00:42

칼의 노래-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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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생각의나무 판 칼의 노래 표지

임진년(1592)에 시작된 왜란은 조선수군의 선전과 명군의 개입으로 1여 년 만에 교착상태에 빠진다. 임진년 이듬해 음력 4월부터 왜군이, 이후 음력 8월부터는 명에서 화의를 추진하게 된다. 지난한 협상은 3년을 끌다가 결렬되고 일본이 다시 쳐들어오면서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휴전이 진행될 당시, 선조와 조정의 출정명령을 계속해서 반려한 이순신은 결국 정유년 2월 통제사직에서 해임,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양으로 압송된다. 압송되어 고초를 겪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내려온 이순신은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1597년 음력 716,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 수군은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른다. 이 일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조선 정부는 12척 만 남은 조선수군을 폐지하고 권율의 육군으로 병합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적이 감히 우리 수군을 업신여기지는 못할 것이라며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다는 말을 남긴다. 이즈음에서 소설이 시작된다. 소설의 화자는 이순신 자신이다.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소설책에 실린 이순신 장군의 칼.

삼도수군통제사는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자리로, 지금으로 치자면 해군참모총장쯤 되는 조선수군의 최고 사령관자리이다.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정유년(1597), 칠천량에서 패배한 원균이 죽자,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된다.

칠천량에서 달아난 배설이 이끌고 온 10척의 배와 나머지를 합해 도합 12척의 군선을 인계 받은 이순신은 아마도 아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분통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칼은 계속해서 이순신의 속에서 운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분노와 살기, 그리고 백성을 향한 연민, 자신을 겨눈 왜적과 조정의 칼끝 어디쯤에서 예리하게 울려 퍼지는 어떤 금속성의 음이랄까? 가늠하기 힘든 바다와 전쟁의 향방, 그리고 선조를 위시한 나약한 조정의 야비함. 그 속에서 칼은 계속해서 운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직후 치른 그 유명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열두 척의 배로 삼백여 척의 배를 맞아 이긴다. 이 전쟁은 정유재란의 판도를 다시금 뒤집는다. 임진년 전투에서 남해와 서해를 이르는 수로를 장악하지 못해 곤란을 겪었던 왜군은 남해 수로와 전라, 충청지역을 먼저 장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칠천량에서의 승리로 정유재란은 왜군의 승리로 귀결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다시 이순신의 수군에 의해 그 시도가 좌절된 것이다. 왜군은 경상도와 전라도 동부 쪽에 똬리를 틀고 앉아 철군만 호시탐탐 노리며 명과 화의를 진행해 나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그런 분위기는 더욱 짙어졌다. 이순신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6년의 전란. 조선팔도는 아수라장, 생지옥이 되었다. 그들이 조선도 아닌 명나라의 군대, 전투에 나서지도 않으며 방자하게 남의 나라에서 천군행세만 하던 자들과 화의하고 뒤 없이 도망을 친다, 라는 것은 조선의 무인된 자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육군의 열세에 퇴로가 막힐 것을 우려한 수군은 목포 앞 바다로 군영을 옮겼다가 수군을 재정비한 뒤 다시 공세에 나선다. 어디에서도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한 이순신은 출정 전야, 선조가 자신에게 내린 면사첩(免死帖)을 불태운다. 전쟁에서 확실히 이길 것을 장담도 못하거니와 살아도 정치적으로 희생될 처지였다. 칼의 노래에서 이런 것들을 벨 수 없는 것이라 이르며, 나는 벨 수가 없다고 자주 되뇐다. 그렇게 출정한 싸움은 쉽지 않았다. 겨울로 들어선 바다는 거칠었고 명나라 수군과 육군은 협조적이지 않았다. 도망가려던 왜군의 군선을 몰아붙이던 노량. 이순신은 왜적의 흉탄에 쓰러진다. 그렇게 이순신이 죽고 정유재란도 끝이 난다.

소설 앞머리에 실린 충무공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이 소설의 매력은 무엇보다 문체다. 일인칭의 문체는 무인 이순신의 심중으로 독자를 거침없이 빨아 당긴다. 화려한 수사를 배제하고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모든 것을 칼로 가르듯 명징하게 이야기한다. 난중일기의 이순신의 문체가 그러하듯이.

이 소설에서는 몇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상징들이 있다. 이는 읽는 각자의 몫이다. 해서 이 소설의 독자로서 필자 또한 나의 을 간략히 남겨두려 한다. 읽게 된다면 필자의 느낌과 자신의 느낌을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필자가 주목한 주요한 상징은 칼, 노래, 바다, ‘길삼봉이다. 칼은 앞서 말했듯 이순신의 무(), 살기, 분노 같은 것을 상징한다. 그의 무는 조선의 무이기도 했다. 조선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해보고 한양을 내어준 나라였다. 개전 초기, 유일하게 이순신의 수군만이 남해안을 철통 방어해냈고 왜군에게 통렬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유일한 칼이었음으로 왜적뿐만이 아니라, 나약한 조정마저 그를 시기하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칼은 이순신의 무인된 마음가짐이기도 했다. 조국을 유린한 적들을 향한 떨림이었다. 개별자, 즉 적이든, 아군이든, 백성이든 생명을 지닌 자에 대한 연민의 떨림이었다. 그리고 그 떨림 마저 베어내는 날카로움이었다. 이런 칼의 노래는 음울할 수밖에 없다. 장군의 내면에서 울리는 울음이고, 통증이다. 그러나 차갑다. 아니, 차가워야 한다.

바다는 예측할 수 없는 조선의 운명과 이순신 자신, 그리고 왜적의 앞날까지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무시로 안개가 짙었고 거칠었다가 맑았고 순했으며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며 배를 뒤흔든다. 이순신이 처한 상황에는 두 가지 결이 있다. 하나는 전쟁의 국면에서 다가오는 운명의 결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상황에서 오는 운명의 결이다. 이 두 대립자는 모순된다. 조정은 자신을 죽이려하지만 왜적 때문에 살려준다. 그러나 이순신의 칼끝은 왜적을 향한다. 이런 기막힌 모순이 또 어디에 있으랴. 모든 곳이 사지(死地)였기에 전장에서의 죽음을 자연사로 받아들이는 소설 속, 이순신의 모습은, 그리고 그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면사첩을 태우는 모습은 깊은 연민을 느끼게 한다. 가늠할 수 없는 슬픔, 고통은 들여다볼 수가 없다. 아니 보아도 가늠할 수가 없다. 마지막 출정을 앞둔 그가 느꼈을 슬픔. 그는 정박할 곳을 잃은 난파선이었다. 노량에서의 죽음은 필연이자, 자연사였다.

마지막으로 길삼봉은 역적의 두령이다. 그런데 실체를 알 수가 없다. 갑이 길삼봉이라 죽이면 을이 또 길삼봉이었다. 길삼봉은 허깨비였다. 그렇게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이런 허깨비는 조선 도처에 있었다. 조정에 있었고 공명심과 자만만 가득한 명나라 군대에 있었다. 이순신은 이것들을 실체가 없어 벨 수 없는 존재라 이야기한다. 그의 칼끝이 미치지 않는, 그가 어쩌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허깨비였다. 그러나 허깨비는 조정을 움직이고 왜를 움직였다. 그 칼과 칼이 미치지 못한 곳, 중간쯤이 이순신의 자리였다. 그곳은 비할 데 없이 외로운 사지(死地)였다.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된 것은 2001년이다. 그 해, 동인문학상을 받았지만 크게 알려지진 못했다. 그러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탄핵 당했던 시기, 이 소설을 감명 깊게 보았다고 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소설을 쓴 작가 김훈은 1948년 생으로 한국일보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오래했다. 47살의 늦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 [칼의 노래], [현의 노래], [자전거 여행], [남한산성]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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