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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편은 필자의 블로그에 연속 게재 중인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의 4부 1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제18장 남북아메리카가 유라시아보다 낙후됐던 원인
가장 대규모 인구교체는 아무래도 구세계와 신세계 간의 충돌에서 빚어진 인구교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대형 동물이 이미 오래전 전멸해 가축화할 대형 포유류가 없었다. 식물성 먹거리 생산량도 적었지만 동물성 먹거리의 생산만큼 불균형이 심하지는 않았다. 그런 데다 더해서, 일부 지방에서 작물화되어 주식이 된 식물마저 구대륙의 작물들에 비해 단백질이 부족한 옥수수였다. 아메리카 대륙이 유라시아 대륙보다 농축업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정복의 직접적 요인들은 병원균, 기술, 정치 조직, 문자 등이었는데, 이들은 앞서 살펴본 대로 식량 생산에 의해 촉진되는 것들이다. 특히 병원균은 치명적인 무기가 되었는데, 대부분 동물을 가축화 하면서 인간에게 넘어온 것들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런 병원균과 싸울 수 있는 면역체계를 미처 갖추지 못했다.
식량 생산이 촉진한 기술적 측면은 병원균에 버금가는 역할을 한다. 금속 기술은 일당 백의 무기술이 된다. 가축의 동력을 이용한 농업의 생산성은 인간의 근력을 이용한 것에 비해 몇 배의 효과를 낸다. 돛을 단 배는 나침반을 이용해 대양을 건널 수 있었다. 기마술과 조총, 대포로 수백의 병사가 수만의 병사를 이겼다. 이런 모든 것을 그냥 나열한다고 정복민이 될 수는 없다. 유럽인들이 이런 자원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데는 이미 오래전부터 농경을 바탕으로 발달시킨 국가라는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마지막으로 문자는 국가체계의 유지, 정보의 전달, 기술의 축적 등에 쓰임으로써 이러한 문명의 발전에 톡톡히 기여했다.
식량 생산은 물론이거니와 살기 시작한 연대 또한 유라시아가 아메리카에 훨씬 앞선다. 그렇다고 정주형 농업이 5천 년이나 차이가 날 수 있었을까? 유라시아인들은 기존의 기술, 지식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었을 테지만, 초기에 아메리카로 건너간 토착민들은 아예 모든 것을 새로이 습득하고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시간차는 거기에서 났을 것이다.
유라시아의 가축들은 비료를 제공하고 쟁기를 끌어주면서 농경의 경쟁력을 한층 더 높여주었는데 아메리카에서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자생하던 식물들은 작물화에 경쟁력이 높지 않았는데, 작물화가 더딜 뿐만 아니라, 생산성도 낮아 정주형 촌락 생활을 안착시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도록 만들었다.
유라시아 동서의 축은 많은 문물을 오가게 했으나, 아메라카의 남북의 축은 위도의 장애 외에도 파나마 지역의 협소함, 사막지역 등으로, 일단 작물화된 식물의 전달도, 유일하게 만들어진 문자체계의 전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했다. 이런 지역적 특성은 언어분포에도 영향을 미쳐, 남북아메리카에는 대규모 언어 팽창의 사례가 없다. 같은 원리로 중앙아메리카에서 발명된 바퀴와 문자는 퍼져나가도 모자랄 판에 사라지고 말았다. 앞서 살펴보았던 오스트레일리아의 태즈메이니아섬처럼 중앙아메리카 또한 육지에 뜬 문명의 섬과 같았던 것이다.
반대의 예로 1492년 콜럼버스이전에 아메리카북부 대륙을 접촉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어째서 아메리카의 새 주인 되지 못했는가? 그 또한 식량생산과 정치조직 등이 그 시기, 무르익지 않아서라 할 수 있다.
현재 아메리카대륙에서 원주민들이 근근이 명맥을 잇고 있는 곳은 그나마 유럽식 식량생산이나 광업에 부적합한 땅 뿐이다. 열대지방의 원주민들마저도 구세계 열대 지방에서 들어온 이민자들로 교체되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은 최고 95%까지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모든 사건은 궁극적으로 B.C.11000년~A.D.1년에 벌어진 여러 일들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제19장 아프리카는 왜 흑인의 천지가 됐는가
아프리카에서 오늘날 흑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불과 몇천 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다른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 흑인들도 각양각색이다.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아프리카에는 전세계 인류를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할 때, 다섯 인종이나 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중 세 인종이 아프리카 원주민이다. 세계 언어의 4분의 1이 아프리카에서만 사용된다. 이 같은 다양성은 아프리카가 독보적이다. 이는 지리적 다양성과 선사시대의 역사가 유구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아프리카의 선사시대는 아메리카의 선사시대와 닮았다.
아프리카의 주요 다섯 인종은 흑인, 백인, 아프리카 피그미족, 코이산족, 아시아 인종 등이다. 흑인과 백인은 대부분 농경이나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한데 반해, 피그미족과 코이산족은 수렵 채집에 많이 종사했다. 가장 놀라운 인종은 마다가스카르에 살고 있는 아시아인종, 즉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다. 선사시대에 그들은 어떻게 배를 타고 여기로 왔을까?
아프리카에는 1500개의 언어가 뒤섞여있지만 이들은 다섯 어족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어족의 분포도를 보면 대략 각각의 어족과 신체적 기준으로 분류한 인종이 일치한다. 이들 어족분포도를 보면 피그미족과 코이산족이 흑인종에게 침탈당해 흩어지거나 쫓겨난 정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적도 아남 아프리카의 니제르콩고계 언어가 모두 반투계라는 하나의 하위 언어군에 속하는 게 밝혀졌다. 추론을 통해 2억 명에 가까운 반투족이 원래 카메룬과 나이지리아에서 발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니제르콩고어족의 분포로 반투족이 다른 곳으로 침탈해 들어갔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반투족은 피그미족과 코이산족보다 무엇이 우월해서 그들을 몰아내고 적도 이남 아프리카의 패자가 될 수 있었을까? 아프리카 토종 농산물의 원산지가 모두 적도 이북, 즉 니제르콩고계 언어의 사용자들이 발생한 지역, 즉 반투족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운이 좋았던 반투족은 이웃한 아프리카인들을 침탈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투족은 B.C.3000년 경 팽창을 시작했다. 늦어도 B.C.2000년경엔 구리 제련도 시작되었다. 농작물에 금속기까지 가지게 되면서 반투족은 아프리카 내에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막강한 집단이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이 흑인의 대륙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마다가스카르에 A.D.800년 이전, 빠르면 A.D.300년 경에 도착했다. 이들을 연구해보면 그 이주민들이 카누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은 소수의 어부들이 아니라 본격적인 탐험대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6400키로가 넘는 대장정이 어떻게 선사시대에 가능했을까? 이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아프리카는 인류의 발상지면서 선사시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한 대륙이다. 그런데 왜 유럽의 식민지가 되었을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유라시아에 비해 식량 생산이 늦게 시작되었다. 이 또한 유라시아인들에 비해 운이 나빴던 지리적인, 그리고 거기에 자생하는 생물상의 탓이었다. 다시 말해 아프리카와 유럽의 역사적 궤적의 차이는 부동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필로그 과학으로서의 인류사의 미래
얄리에게 저자는 말한다. ‘각 대륙의 사람들이 경험한 장기간의 역사가 크게 달라진 이유는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인간의 창의성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인가 반문할 수 있다. 물론 소용이 있다. 그러나 창의성 또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어떤 환경에 비해 더 많은 재료를 구비하고 있는 곳에서 창의성은 더욱 잘 발현될 것임이 분명하다.
어째서 서남아시아나 중국이 아닌 유럽이 아메리카 등을 정복하고 세계적으로 우세한 인간 집단이 되었을까? 고대 서남아시아 땅은 강력한 제국들의 탄생지였으나, 점점 난개발과 목축 등으로 척박해진 탓이다. 현재 서남아시아는 농업에 이점이 거의 남지 않은 땅이 되어버렸다. 서남아시아인들은 자원의 기반을 스스로 파괴하는 생태학적 자살을 저질렀다. 그렇다고 유럽인들이 서남아시아인들에 비해 현명했다는 뜻은 아니다. 유럽이 서남아시아에 비해 식물이 더 빨리 재생될 수 있는 지역이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면 중세 세계 기술을 선도한 중국은 왜 뒤쳐지게 되었을까? 전형적인 정치적 퇴행의 결과다. 정화의 함대는 정치적 역학구도가 바뀌면서 해산되었다.
콜럼버스가 수백 명이 넘는 유럽의 군주 가운데 한 명을 설득해 배를 얻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유럽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후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앞다투어 진출한 이유도 서로 경쟁하고 있었던 탓이다. 반면 만성적인 통일국가였던 중국은 퇴행도 전방위적이었다. 어리석음, 혹은 정치적 목적에 의한 혁신의 거세가 잦게 발생했다. 이런 차이도 지리적 영향이 크다. 고립된 지역이 많았던 유럽은 언어와 민족이 더 잘게 나뉘어 만성적인 분열상태였고 중국은 지리적으로 단절된 곳도 적어 만성적 통일 상태일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상대적으로 서남아시아 문명에 비해 조금 멀찌감치 떨어진 고립된 섬과도 비슷했다.
환경과 무관하고 처음에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던 어떤 특이한 문화적 요소가 나중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장기적인 문화적 특징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쿼티자판이나, 한자 등이 그러한 예인데, 이 같은 요소들의 의의는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개인의 특이성도 역사, 사회에 영향을 크게 끼치는 경우가 많다. 히틀러나 알렉산더 대왕, 아우구스투스, 석가, 예수, 레닌 등등. 그러나 제아무리 영웅, 거인이론을 인정하더라도, 역사의 가장 광범위한 경향까지 좌우할 수는 없다. 역사학자는 통계적 추세만을 정립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류사학, 과학적 역사학은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방법론들을 얻어내었다. 우리는 어떤 일들이 현대 세계를 형성했고 또 어떤 일들이 우리의 미래를 형성하게 될 것인지 알려줌으로써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도 보탬이 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총, 균, 쇠>의 4부를 간략히 요약해 보았다. 4부는 대체로 1, 2, 3부에서 저자가 주장했던 문명발전의 불균등 원인에 대한 고증들이다. 이를 테면 사례를 통한 <총, 균, 쇠>논리의 되먹임이랄까?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이렇게까지 ‘환경이 인간사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이다.’라고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가설이든 맹점은 있다. 그것은 인류사학 같은 연구분야에서 더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세세한 예외적 사실로 이 학설을 반박할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하나의 가설이나 예외일 뿐이고 절대성을 부여받기는 어렵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조건과 필요한 조건,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조각가의 창의성은 조각칼과 조각할 재료가 있어야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은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시간, 공간, 재료 등등. 식량 생산이 인간에게, 정확하게는 식량 생산을 시작한 인간 집단에게 그런 시공간을 열어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음 편에서 2003년 특별 증보면의 내용과 독서후기로 찾아뵙겠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다.
(독서후기로 이어집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특별증보편과 독서후기
(이제 길었던 <총, 균, 쇠>의 마지막 이야기다. 끝까지 읽으신 분이라면 꽤 지루하셨을 것이다. 미숙한 탓에 의미전달이 깔끔하지 못했던 것들이 종종 있을 것이다. 양해 바란다.) [특별 증보면] -
booklogoo.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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