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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인류사의 발전적 연구 과제와 방향]

제15장 대륙 간 불균형 이론과 원주민들이 낙후된 원인

약 4만 년 전만 해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사회는 다른 인간 사회보다 발전된 사회였다. 해부학적 현생 인류가 살기 시작한 시기도 서유럽보다 먼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유럽에 지배당하는 운명에 처했을까? 인종 차별적 결론이 옳게 보인다. 과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의 인간 사회는 아시아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아시아 사회와는 격리된 상태였다. 이는 두 대륙 인종간의 유전적 차이에서 증명된다. 처음 그레이터 오스트레일리아(홍적세 이전 뉴기니와 연결된 오스트레일리아)에 건너간 아시아인(현재 오스트레일리아인의 조상)과 현재 중국 등의 아시아인 간의 유전적 차이는, 대륙이 바다로 나뉜 후, 아시아의 인종이 교체된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촌간인 뉴기니와 오스트레일리아 인간 사회마저도 자연환경적 차이가 커, 두 지역의 문화도 판이하게 달라진다.

뉴기니 고지대에서는 최고 9000년 전부터 농업이 시작되었다. 사탕수수, 잎줄기 채소 등의 야생조상은 뉴기니가 원산지다. 따라서 뉴기니의 농업은 독립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지대 농업의 발달로 뉴기니에서는 수천 년 전, 인구가 폭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몇백 년 전 고구마가 도착하면서 또 한번 인구폭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뉴기니는 원시적이었다. 금속기도 없었고 추장 사회로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뉴기니의 고지대 토착 작물은 단백질이 낮은 뿌리 작물이었고, 2종밖에 없는 가축은 그나마 너무 적었다. 두 번째 요인으로 면적이 좁아 조밀한 인구를 지탱할 수 없었던 점이다. 세 번째, 뉴기니의 식량생산이 가능했던 지역이 해발 1200~2700m 사이의 중간 저산대 뿐이라는 현실은 각각의 부족을 고립시켰다. 이러한 이유들로 뉴기니의 인구는 100만을 채 넘지 못했음에도 전세계 언어 6천 개 중 1천여 개나 가지고 있다.

그나마 오스트레일리아 쪽은 농업도 축산업도 발달시키지 못했다. 앞서 말했지만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대형 유대류는 인류가 이 대륙에 발을 디딘 몇 세기만에 멸종하고 만다. 토양은 척박하고 건조할 뿐만 아니라 ‘엘니뇨 남방 진동'형상 때문에 연중기후마저 규칙적이지 못했다. 유랑, 수렵 채집, 거처나 소유물에 최소한의 노력만 투자하는 원주민의 태도는 결국 이런 환경에 지혜롭게 적응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먹거리 장만하는 방법을 점점 발달시켜, 소철류 씨앗에서 독성을 걸러내거나 민물장어를 양식할 수도 있었고, 특히 야생 기장의 씨앗을 수확해 먹기도 했는데, 이 때 사용한 도구들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독립적으로 발명했던 도구들과 비슷했다. 기장을 수확한 일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농작물 생산이 시작될 수 있었음을 의미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어째서 금속기, 문자, 정치적으로 복잡한 사회를 만들지 못했나?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수렵 채집민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비교적 생산성이 높은 지역들은 생태학적 섬이 되었고 각 지역들은 고립되어 있었다. 몇 가지 정황증거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이 기술적으로 퇴보하기도 했음을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1만 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고립된 태즈메이니아인 4000여 명은 미늘 달린 창, 뼈로 만든 도구, 부메랑, 간석기, 자루 달린 석기, 낚싯바늘, 그물, 삼지창, 통발 등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 흔히 쓰이던 도구도 없었다. 물고기를 잡아먹거나 바느질을 하거나 불을 피우지도 못했다. 비슷한 시기 태즈메이니아처럼 분리된 200~400명 규모의 작은 섬에서는 인구가 완전 소멸하기도 했다. 이런 예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겨우 몇백 명 정도의 고립된 인구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과 인구가 4천 정도면 1만 년은 생존이 가능한데, 문화적 손실이 크고 발명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의 인구 30만 명은 대륙 중에서 가장 적은 인구였고, 가장 고립된 사람들이었다. 태즈메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차이처럼 다른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는 그렇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인도네시아와 접촉한 흔적은 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선별적으로 필요한 것만 수용했고, 인도네시아인들 또한 그들 농사 기후에 맞지 않는 대륙에 정착하려고 하지 않았다. 뉴기니의 문명이나 기술도 마찬가진데,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인들은 사실 뉴기니 본토인들을 본 적도 없다. 중간에 있는 섬들에서 접촉이 이루어졌을 따름이었다. 이 모두는 인류의 문화와 기술이 전달되는 데, 지리적 환경의 역할이 크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다.

뉴기니 저지대에 정착하려는 유럽인들의 계획을 번번이 좌절시킨 것은 다름 아닌 말라리아 같은 열대성 질병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뉴기니인들은 유라시아와의 교역으로 이미 유라시아의 병원균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착에 알맞은 고지대로 진출할 당시의 식민정부는 학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미 20세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뉴기니섬엔 독립국이든, 아니든 뉴기니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그런데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의 운명은 좀 달랐다. 바다를 건너온 총기, 병원균, 쇠에 원주민이 제거 당했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 학살을 꺼리지 않던 18세기, 19세기에 유럽인들이 진입했으며, 유라시아에서 온 병원균이 뉴기니와는 다르게 오스트레일라 원주민에겐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제16장 동아시아의 운명과 중국 문화의 확산

대부분의 인구가 많은 나라들은 인종, 민족의 도가니라서 수많은 언어와 문자가 공존하게 마련인데, 유일하게 중국만은 다르다. 중국은 B.C.221년에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지금까지 거의 그 상태를 유지 중이다. 12억 인구 중(1997년 출판된 책임을 감안하라), 8억 이상이 만다린어(중국 표준어)를 사용한다. 나머지 3억도 비슷한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북중국인과 남중국인은 유전적, 신체적으로 매우 다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수만 가지의 언어가 생겨났을 텐데, 그 많은 언어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중국엔 사실 여덟 가지 다수 언어 뿐만 아니라 130개 이상의 소수 언어가 있다. 이들은 모두 네 가지 어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언어가 교체되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중국어 사용자들은 다른 민족 집단을 원시적이고 열등하다며 내쫓거나 그들의 언어를 바꿔버리는 데 유난히 적극적이었다. 이 같은 교체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주자들이 전쟁, 살인, 질병을 도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런 이점은 식량생산을 먼저 시작한 데서 기인한다. 

중국은 식물의 작물화 및 동물의 가축화가 세계 최초로 시작된 중심지 가운데 하나다. 북중국 최초의 농작물은 기장류였고 남중국의 경우 벼였다.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축을 통해 서아시아와 활발하게 문물을 주고받는다. 본토내의 다양한 문화들은 지리적 이점에 의해 쉬 통합되었다.

동아시아 내에서 중국은 식량생산, 기술, 문자, 국가 형성 등에서 출발이 빨랐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만든 각종 문물은 이웃 지역들까지 발전시켰다. 중국의 밀어내기로 아주 적은 수렵 채집민 집단만 잔존해 있는데, 이들은 현대 뉴기니인들과 닮았다. 동아시아문명을 잉태시킨 중국의 역할을 너무 과장해서도 안 되겠으나, 그 역할이 컸다는 것은 또 부인할 수가 없다. 문자와 언어가 다른 한국과 일본에서 한자가 아직도 일부 상용되는 것은 거의 1만 년 전, 중국에서 가축화, 작물화가 시작된 생생한 흔적이다. 



제17장 동아시아와 태평양 민족의 충돌

지난 6천 년 동안 일어난 인구이동 중, 대표적인 것인 현재 자바인들의 조상이 자바와 뉴기니로 이주했던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팽창'이다. 그들의 한 갈래는 태평양의 가장 외딴 섬까지 차지한 폴리네시아인들이다. 어째서 중국 본토에서 출발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자바 섬을 비롯한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이주하여 그곳 토착민을 교체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째서 뉴기니 고지대에 살던 원주민들은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을까? 

4만 년 전, 인류가 뉴기니나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려면 분명 인도네시아를 거쳤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뉴기니인, 오스트레일리아인과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인은 전혀 닮지 않았고 언어적 이질성도 크다. 이는 오스트로네시아계가 최근에 이 지역의 토착민을 교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4개 어파 중, 3개 어파가 타이완 원주민에게 집중되어 있다. 오스트로네시아계 언어들은 모두 타이완에서 시작된 인구 팽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타이완과 그 맞은편 남중국 본토 해안에서 B.C. 4000년~3000년 경부터 간석기와 독특한 장식을 한 타펜켕 토기가 처음 나타난다. 이런 유적지에서는 까뀌도 많이 발견되는데 카누를 만들었다는 증거가 된다. 타이완의 타펜켕 문화와 그 이후에 발생한 태평양 여러 섬의 문화를 이어주는 독특한 인공물은 나무껍질 두드리개이다. 나무껍질을 두드려 끈, 그물, 의복 등을 만들 때 쓰는 돌로 만든 도구다.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타펜켕 문화가 타이완에 도착한 후, 더 멀리 전파, 현재의 오스트로네시아 일대를 채워갔다. 이런 팽창은 마다가스카르 섬까지 닿았다.

고고학적 증거와 언어학적 증거는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다. 같은 어족 안에서는 오래된 사물이나 발명품들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언어분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비슷한 낱말로 남는다. 비슷한 낱말로 남은 어휘는 복원이 가능한데, 이렇게 복원해본 결과 오스트로네시아어에는 돼지, 개, 벼 등의 낱말이 공통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분화 이후에 나온 발명품이나 개념은 아예 다른 형태로 각각 다르게 자리잡는다. 같은 어족 가운데, 공통어원이 없는 낱말의 경우 그 지역에서 새로이 개발되거나 발견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아무튼 이들 또한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인들을 교체한 것과 같이 인도네시아 등의 토착민들을 거의 완전히 교체했다. 역시 기술과 병원균 등이 무기였다. 

이런 오스트로네시아인의 언어, 유전자도 상대적으로 가까운 뉴기니에는 안착하지 못했다. 뉴기니 언어가 속한 파푸어 언어군은 세계의 어느 어족과도 무관하다.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뉴기니 본섬 가까이 작은 섬들에만 머물렀다. 뉴기니인들은 이미 수천 년에 걸쳐 식량을 생산하고 있었다. 열대성 질병에 대한 면역력도 이미 뉴기인들은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팽창이 낳은 각기 다른 결과는 인구 이동에 작용하는 식량 생산의 역할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다. 이렇게 동아시아와 태평양 일대는 환경이 역사를 형성했던 수많은 사례들을 잘 보여준다. 유럽인들 역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뉴기니에 안착 못한 것처럼, 태평양 섬지역들을 일시적인 지배 외에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착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토착적인 식량 생산자들과 병원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 균, 쇠 4부, 15장, 16장, 17장에서는 풍부한 고고학적, 언어적 사례들을 통해 1, 2, 3부에서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주장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어지는 4부 2편에서 계속 이어가겠다. 

(4부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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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4부 2편

(본 편은 필자의 블로그에 연속 게재 중인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의 4부 1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제18장 남북아메리카가 유라시아보다 낙후됐던 원인 가장 대규모 인구교체는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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