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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4부 플뤼메 거리의 서정시와 생 드니 거리의 서사시
Ⅰ. 몇 쪽의 역사
1. 훌륭한 재단
1831년과 1832년, 7월 혁명과 직접 관련된 이 두 해는 혁명의 위대함이 있는 특수하고 놀라운 시기다. 사람들은 휴식을 원했다. 첫 번째 계주를 미라보와 더불어 했고, 두 번째 계주를 로베스피에르와 더불어 했으며, 세 번째 계주를 보나파르트와 더불어 하였다. 사람들은 녹초가 되었다. 피로한 사람들은 휴식을 원하는 동시에 이루어진 기성의 사실들의 보장을 원한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돌아온 부르봉 가는 자기가 주었던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들 역시 나폴레옹을 치워 없앤 손아귀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의 뿌리는 국민 속에 있는 것이다.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에 필수요건이 아니었다.
부르봉 왕가가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양여’했다고 생각한 보장들에 손을 댄 것은 중대한 과오였다. 그것은 시민들이 쟁취한 권리지 양여한 것이 아니다. 7월의 칙령(1830년)이라 불리는 유명한 법령의 근본이 바로 그것이다. 왕정복고는 쓰러졌다.
그렇다고 왕정복고정부가 진보에 절대적인 적은 아니었다. 이 시대 국민은 평온 속에서 토론에 익숙해졌는데 그것은 공화국에 없는 일이었고, 평화 속에서 위대성에 익숙해졌는데 이는 제국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혁명은 로베스피에르 아래에서 발언권을 가졌고 대포는 보나파르트 아래서 발언권을 가졌는데, 지성의 발언 차례가 온 것이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아래서다. 법 앞에 평등,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등의 권리는 1830년까지 그렇게 갔다. 부르봉 왕가는 신의 손안에서 깨진 문명의 도구였다.
부르봉 왕가의 몰락은 엄숙한 소멸이 아니었다. 왕당파의 폭동에 무력 공격을 당한 국민들은 차분하고 지혜롭게 대처했다. 부르봉 왕가는 추방되었다.
7월 혁명은 즉시 전 세계에 벗들과 적들을 가졌다. 유럽의 군주들은 아연실색했다. 7월 혁명은 사실을 타도하는 권리의 승리다. 1830년 혁명의 광채는 거기서 유래했고, 그 관용 역시 거기서 유래한다. 승리하는 권리는 하등의 폭력도 필요치 않다.
권리는 정의요, 진리다. 사실에 권리가 적거나 없다면 그것은 더러워진다. 이 권리와 사실의 투쟁은 사회가 시작된 이래 계속되었다. 이 싸움을 끝마치고, 순수한 관념과 인간의 현실을 융합시키고, 권리를 사실 속에 조용히 침투시키고, 사실을 권리 속에 침투시키는 것, 이것이 현인들의 일이다.
[참고]
-작자가 몇 쪽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에 얹어서 프랑스혁명과 7월, 2월 혁명 등은 짚어두고 이야기를 계속하고자 한다.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배경지식으로 알고 있어야 될 듯해서이다. 전문이 위키백과의 내용이며, 검색에 들일 품을 절약하는 용도 정도라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오타 등은 필자가 할 수 있는 만큼 수정했음도 아울러 밝혀둔다. 기본적인 배경 지식이 있는 분이라면 읽지 않고 통과해도 될 것이다.
<프랑스 혁명>
프랑스혁명(프랑스어: Révolution française [ʁevɔlysjɔ̃ fʁɑ̃sɛːz], 영어: French Revolution, 1789년 5월 5일 ~ 1799년 11월 9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 사회는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 구체제)하에서 18세기에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난 일반적 특징처럼 자본가 계급이 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발생한 심각한 경제 불황은 인구의 절대다수(98%)를 차지하던 평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으며 마침내 흉작이 발생한 1789년에 봉기하게 되었다. 시민과 농민의 개입으로 민중혁명의 단계로 변화된 이 혁명은 3년간에 걸쳐 모든 체제를 전복시켰다. 혁명 소식을 접한 피지배 민족들이 자유와 독립 쟁취 의식에 고취되자 여러 민족을 거느린 유럽의 군주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프랑스 혁명이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무너뜨린 후 80년간 공화정, 제정, 군주정으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불안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계사적으로 볼 때 프랑스 혁명은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사에서,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지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다. 자본주의의 발전기에 있어서 시민 계급이 절대 왕정에 저항하여 봉건적 특권 계급과 투쟁해서 승리를 쟁취했으며 새로운 정부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낸 최초의 사회 혁명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는 18세기에 들어와서 혁명 전야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 ~ 1714년), 미국 독립 전쟁 (1775 ~ 1783년)을 비롯한 여섯 차례의 큰 전쟁에 참여했다. 참전의 결과는 프랑스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재정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루이 14세 (재위 1643~1715년)의 말년에 국가 재정은 위기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더욱 심각해지고 만성화 되어 갔다. 또한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프랑스 내에서 가톨릭 이외의 개신교도 인정하는 칙령으로 1598년 앙리 4세가 선포했다.)의 폐지(1685년) 와 위그노 추방은 프랑스 산업 발전에 심각한 악재로 작용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의 발전은 영국에 비해서 지지부진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중농주의자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곡물 거래의 자유, 인클로저의 자유를 요구하는 세력이 대두되고 있었다. 공업 부문에 있어서도 면직물 공업이 18세기 초부터 부상하기 시작해서 재래의 모직물 · 린네르 공업과 경합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길드의 규제는 여전히 강했으나, 자본주의식 공장제 수공업(manufacture)이 각지에서 증가하고 있었다.
1774년 중농주의자인 재무총감 튀르고는 부르주아의 발전을 저지하던 영주와 국가의 통제를 없애버리려 했다. 1776년에는 ‘여섯 가지 칙령’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농민을 노예 수준의 부담에서 해방시키고, 공업에 있어서의 길드제를 폐지하며, 농업과 노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이해와 대립하는 봉건적 귀족과 그들에 기생하던 특권 상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불가피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발전에 대응하여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에서는 직조공들의 파업이 18세기 후반에 연이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한편 귀족 계급은 성직자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다. 군대에 복무하는 군인 귀족과 법무에 종사하는 법조 귀족이 대표적인 귀족이었지만, 약간의 귀족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대귀족은 궁정 (宮廷)에 빌붙어 영지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보냈으며,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에는 절대왕권 제도와 절대왕권제의 지지자였던 귀족들 거의 대부분도 재정적 곤란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농민을 더욱 착취하여, 농촌을 거의 황폐화시켰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가 발전하려면 사회적 대변혁이 불가피했었다. 계몽 사상가는 이와 같은 결함된 사회 제도를 맹비난하면서 합리적인 사회제도의 출현을 선동했다. 당시 프랑스는 계몽사상가인 장자크 루소(1762년에 저술한 《사회 계약론》에서 자유와 평등의 자연권을 국가 상태에 있어서 확정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서 사회 계약론을 전개하고 인민주권의 이론을 완성하였다. 권력 행사가 정당화되는 유일한 조건으로서‘항상 정당한’ 일반 의지를 설정하고, 실제에서는 그것이 직접적인 다수결(多數決)에 의하여 확인될 수 있다고 하였다.)와 백과전서파인 볼테르 등 사회계약설이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국민이 공감하여, 당시의 사회 제도(구체제)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봉 왕가 정부, 특히 국왕 루이 16세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특권 계급과 국민과의 괴리를 채울 수 없었다.
불평등한 사회 체제
프랑스 혁명은 이런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모순에서 발생하였다. 구체제 하에서는 인구의 2% 정도밖에 안 되는 제1계급인 성직자와 제2계급인 귀족은 전체 토지의 40%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면세 등의 혜택을 누리는 등 주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하였다.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던 제3계급(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제3계급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삼부회가 있었지만 175년간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국가 재정 파탄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영국의 아메리카 대륙 진출을 견제하려고 미국 독립 혁명(1775~83년)을 지원하였으나 과도한 군사비 집행으로 인해 재정궁핍에 빠지게 된다. 또한 프랑스 왕실재정 역시 선대의 향락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났다. 1787년 2월, 재정총감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를 제안한다. 그러나 귀족·성직자들은 파리 고등법원과 결탁해 재정 안에 저항하였고 그로인해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메우기 위해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점점 과중해졌다.
루이 16세에 이르러 재정은 파탄 나고 흉년이 거듭됐으며 1785년 목걸이 사건이 일어나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의회에 미움을 사게 되고 왕실에 대한 불만은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극에 달하게 된다. 목걸이 사건은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을 도용하여 돈과 목걸이를 손에 넣은 사기극으로 재판을 통해 왕비의 결백이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왕비의 사치가 재정 위기를 초래했다는 오해를 퍼뜨리게 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왕비는 대중에게 미움털이 박혔고 프랑스 혁명기인 1793년 10월 16일 참수형에 처해지는 간접적 원인이 된다.
민중의 사회 개혁 의지
제3계급 중에서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지식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전문직 일명 부르주아지 계층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써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1, 2신분을 제치고 사회의 주도층이 되길 원하고 있었다. 이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신봉하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 노동자, 빈농, 인민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다. 이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자크 루소의 직접민주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열망에서 특권층에 의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항거하려는 이념으로 혁명에 가담하였다.
명사회 개최
명사회 (1787년 2월 22일)
1787년이 되자 상황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빵의 품귀와 물가 폭등으로 민중의 불안이 증가했고 폭동과 시위가 잇달았다. 1787년 2월 22일, 루이 16세는 144명의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명사회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재무부 장관 칼론은 160년 만에 소집된 명사회에서 국가 재정을 살리기 위해 인지세와 토지세 인상 등 세제 개혁을 제안했다. 또한 많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와 같은 특권 계급에 대한 과세도 논의 주제로 삼았다. 면세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었던 명사회의 대다수는 이를 반대했다. 세제개편안 때문에 칼론은 정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는데 공금유용 등 비리가 폭로되자 1787년 4월 8일에 루이 16세는 그를 해임하였다. 칼론의 후임으로는 툴루즈 대주교인 브리엔을 임명하였다. 새로운 채권 발행, 곡물 거래 자유화 등만 승인하고 명사회는 5월에 해산되었다.
혁명의 전개
삼부회 소집(1789년 5월 5일)
명사회는 제1, 제2신분인 귀족과 성직자로만 구성되었기에 면세 특권층인 이들에게 징세추징을 위한 세제 개혁안을 승인 받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도처에서 삼부회 개최에 대한 요구가 빈번했고 1788년 8월 8일, 재무부 장관 브리엔은 국왕으로부터 삼부회 소집을 허락받았다. 8월 16일, 국고가 바닥나서 국가 지불 정지가 선언되었다. 8월 25일, 약탈과 폭동이 빈발하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브리엔을 해임하고 네케르를 다시 불러들였다.
네케르는 공채발행을 통해 급한 위기를 수습하였고 1788년에 명사회를 다시 소집했으나 별 소득이 없자 12월 12일 해산하였다. 1789년 초가 되자 삼부회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가 진행되었다. 선거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정치적 인쇄물이 늘어나고 정치토론이 활성화되었으며 여러 정치담론이 형성되었다. 삼부회에 참석할 대표 선출은 신분별로 일정한 자격과 기준으로 선정된 대의원(선거위원)들이 신분별 회의를 통해 지명,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신분별 참석 인원수는 1614년의 선례에 따라 각 신분별 동일한 인원수로 구성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3신분(평민)은 지방 의회에서처럼 평민대표의 인원은 2배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결국 루이 16세는 이 요구를 허락하였다.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175년 만에 삼부회를 베르사유 궁전의 살 데 메뉘 플레지르(Salle des Menus Plaisirs)에서 열었다. 성직자 290명, 귀족 270명, 평민 58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그러나 삼부회는 초반부터 머릿수 표결과 신분별 표결을 놓고 의견이 충돌하며 난항이 거듭되었다. 신분별 표결방식은 각 신분별 의결 후 1표만 행사할 수 있었는데,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가 기득권 수호를 위해 협력하므로 대부분 2대 1이 되어 제3신분인 평민이 불리했다.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릿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표결 방식의 채택을 주장했다.
또한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급은 면세 등 각종특권 폐지와 부동산에 대한 중세적 권리 폐지 등의 개혁을 위해 합동 회의를 통한 토론을 요구했다. 기득권 유지를 원했던 귀족과 성직자들은 신분별 회의 진행을 주장했다. 결국 삼부회는 해결점을 못 찾고 첨예한 대립만 오고가며 파행이 이어졌다.
테니스 코트 서약(1789년 6월 20일)
평민 대표들은 머리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자신들이 국민의 98%를 대표한다는 주장과 함께 6월 17일에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아울러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평민대표들의 도발에 분노한 루이 16세는 측근들과 귀족대표들의 의견에 따라 '국민의회'의 해산을 명한 후 회의장을 폐쇄해 버렸다.
회의장이 폐쇄되자 1789년 6월 20일 국민의회 측(평민대표들)은 테니스 코트로 이동하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이에 대해 서약문을 작성하였다(테니스 코트의 서약). 국민의회에는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던 로마 가톨릭 사제와 자유주의 귀족 47명도 합류하였다. 7월 9일에는 제헌국민의회라 칭하여, 인민의 최고 입법 기관으로서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
바스티유 습격
왕당파가 제헌국민의회의 무력 탄압을 기도하여,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지자, 1789년 7월 12일부터 군대와의 사이에 충돌을 반복하였다. 7월 14일 아침, 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민중들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리고 감옥으로 쇄도하여, 감옥을 점령하였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트가 세워지고 자치위원회가 주도하여 바이이를 새로운 시장으로 선출하였으며 민병대(국민군) 사령관으로 라파예트를 임명하였다. 루이 16세는 군대를 철수시킨 후 7월 18일에는 파리를 방문하는 등 사태를 진정시키려 노력하였다. 한편 혁명이 여파는 지방으로 확산되어 격렬한 동요가 있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자치위원회와 국민방위대를 조직하고 정치범 수용소, 요새, 성들을 장악하였다. 국왕이 임명한 지사나 군사령관들은 국민방위대에 저항하지 않았고 그들의 활동에 대해 방임으로 일관했다. 이로써 국왕의 권위는 지방에서도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도시들은 상호 연맹을 맺고 협력하였다.
농민반란
농민들도 혁명에 휩쓸려 봉기하였는데 이들은 총뿐만 아니라 낫, 쇠스랑 등 농기구를 들고 매우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방법들을 행동으로 옮겼다. 성들을 약탈하고 자신들을 억매였던 문서를 불살랐으며 영주와 지주들을 공격하였다. 이런 폭력적인 현상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며 대공포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로 심각성을 띄었다. 삼부회나 국민의회(제헌의회)의 활동 중에 농민과 도시 노동자(프롤레타리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발언권이 없었다. 지방도시의 봉기에서 자치위원회나 국민방위대 조직 시에도 무산계급(소작농과 노동자)는 배제되었다. 혁명과 제3신분의 대표선출은 대부분이 부르주아 출신이 주도하며 무산계급의 발언권은 묵살되었다. 권리요구의 완충지대가 없이 억눌렸던 욕구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
제헌의회(국민의회)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며 민중과 농민의 급진적인 행동으로 인한 무질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8월 4일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였다. 봉건지대 유상폐지라는 시대적 한계는 있었으나 영주제와 농노제 폐지, 개인적 예속의 폐지, 소득에 비례한 세금납부 등이 기본내용이었다. 제헌의회(국민의회)의 개혁은 지속되었으며 8월 26일에는 인권선언을 발표하였다. 주권재민, 사상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재산, 투표, 과세의 평등, 소유권의 신성 등 새로운 사회질서의 원칙을 제시하여 혁명의 정의와 이념을 세웠다. 인권선언은 자연권 사상과 계몽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미국의 독립 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베르사유 행진
베르사유 여성 행진(1789년 10월 5일)
루이 16세는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의 재가를 거부하며 군대를 베르사유로 이동시켰다. 파리에는 '인민의 벗'을 비롯한 많은 새로운 신문이 창간되었고 국민의회(제헌의회)는 헌법제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바스티유 습격 사건과 봉건제 폐지 등으로 놀란 귀족들은 망명길에 오르기 시작했고 귀족들로 인해 번성했던 직업에 종사했던 이들이 일거리가 사라지며 실업자가 증가하였다. 전년도의 기상이상으로 인한 대흉작은 밀 수확량을 급감하게 만들었고 파리의 빵 값이 치솟으며 서민들의 궁핍한 생활이 이어지자 불만과 원망이 폭발 일보직전에 놓여있었다. 이런 파리의 시민들의 사정과는 달리 베르사유에서는 플랑드르 군대를 위한 호화로운 연회가 10월 1일 벌어졌는데 이때 군인들에 의해 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삼색기가 훼손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 시민들은 다시 흥분하였다. 특히 이번에는 빵 값 폭등으로 화가 난 여인들이 전면에 나섰다. 7천여 명의 여인들이 파리 시청으로 모여들어 "빵을 달라"고 외치며 10월 5일 베르사유 궁전을 향해 행진을 하였다. 약 20km가 넘는 이 행진에 국민방위대도 동참하였다. 갑작스럽게 베르사유 궁전 앞에 몰려든 군중을 보고 당황한 루이 16세는 인권선언을 재가하며 이들을 달랬다. 그날 밤 이슬을 맞으며 노숙한 여인들은 다음날 궁전에 난입하여 국왕의 파리 귀환을 요구했고 국왕 일가는 군중들과 함께 파리로 이동하였다. 이후 국왕 일가는 파리 시민들의 감시 속에 튀틀리 궁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국민의회도 파리로 이동하였다.
이 시기의 혁명은 온건한 미라보, 라파예트 등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시민군은 자유주의 귀족 라파예트를 총사령관에 임명하였고, 1790년에는 그의 제안에 따라 삼색기(현재 프랑스 국기)가 혁명의 깃발이 되었다.
사회 개혁 작업
파리에 거주하게 된 루이 16세는 사실상 입헌군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정국의 주도권은 국민의회가 발휘하였다. 자코뱅 클럽과 같은 정치 클럽이 활성화 되면서 정치활동도 활발해졌다. 1790년에 풍작으로 시위와 소요가 줄어들고 민심도 안정화된 가운데 프랑스 사회의 전반에 대해서 다양한 개혁이 진행되었다. 재정적자와 50억 리브로에 가까운 부채문제 해결하기 위해 성직자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국유재산을 담보로 공채인 아시냐(공채)를 발행했다.
교회에 대한 개혁 작업은 1789년 11월 2일에 성직자와 교회 재산에 대해 국유화가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 수도원을 해체하고 1790년 7월 성직자 민사기본법을 제정하여 성직자를 국가 공무원화 하여 월급을 지급하였다. 이를 통해 사실상 서임부터 교황이 아닌 국가가 관리하였다. 이를 위해 국민의회는 성직자 민사기본법의 준수에 대한 선서를 성직자들에게 요구하였는데, 이를 거부하는 교회의 일부 세력은 반혁명 운동에 가담하는 등 저항하였고 교황 비오 6세도 이에 대해 비난하였다.
이 밖에도 길드(동업조합)폐지, 재판제도 등 사법부 개혁, 조세제도를 개편하였고 행정구역을 재조직하여 전국을 83개의 도와 그 하위 행정구획으로 나누었다. 재산 제한 선거제가 도입되어 일정이상 세금을 납부하는 평민(남성)들도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국민의회의 개혁 작업은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공채 아시냐는 단기간 내 재정 확보에는 기여를 했지만 인플레이션을 조장하고 경제를 악화시켰으며 종래에는 가치가 하락하였다. 의회 내 개혁파 정치세력도 분열하는 흐름이 있었다. 알자스에서는 독일 제후들과 영토분쟁이 있었고 아비뇽 그리고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특권파 인사들이 소요도 있었다. 또한 외국의 군주들은 프랑스 혁명을 점차 불안한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며 망명파 프랑스 귀족들은 이런 불안감을 부풀리고 조장하기도 했다.
바렌 사건
혁명 발발로 귀족과 성직자들 중 국외 망명자가 증가함에 따라 국왕이 의지할 국내세력은 점차 약해져 갔다. 1791년 4월, 국왕과 혁명세력 간에 중개자 역할을 해오던 미라보가 갑자기 사망하자, 과격한 혁명을 반대해온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분이 있는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1791년 6월 20일,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 일가는 국경 앞의 바렌에서 민중들에게 발각되어, 6월 25일 파리로 되돌아왔다. 프랑스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으며 동시에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드러나게 되었다.
의회는 프랑스인들을 실망시킨 루이 16세의 왕권을 중지시켰으나 의회 내 내분이 생기면서 7월 15일경 루이 16세의 권한을 복위시켰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는데, 7월 17일에는 급진적인 공화정을 주장하는 코르들리에(cordeliers)라는 정치 클럽의 주도하에 민중들이 파리에서 국왕 폐위와 재판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국민방위대에게 무자비하게 진압 당하여 수십 명이 사망하는 샹 드 마르스의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한편 망명실패 소식을 접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는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프랑스 왕비)와 부르봉 왕가의 신변안전과 왕권 복위를 돕고자 각국 군주들에게 파두아 회람을 돌려 프랑스의 상황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또한 프로이센과는 동맹을 맺고 8월 27일 《필니츠 선언》을 통해 국민의회를 외교적으로 압박하였다. 그러나 필니츠 선언은 역효과를 발생시켜 파리 시민들을 자극하였다. 루이 16세가 외국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국왕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만 커지고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충성심마저 사라져 버렸다.
입법 의회
1791년 9월 3일에 제한 선거와 입헌 군주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1791년 프랑스 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헌법을 바탕으로 그해 10월이 되어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를 통해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의회주의와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어 새로운 의회인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 입법의회에는 중도파가 340석,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온건파인 푀양파가 240석, 국왕 없이 공화제를 주장하는 자코뱅파가 130석을 차지했다. 푀양파는 주로 의사당의 우측에 앉았고 자코뱅파는 주로 좌측에 앉았는데, 이로 인해 온건한 세력은 우파, 급진적인 세력은 좌파라고 부르는 관행이 생기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항
프랑스 혁명의 타깃은 봉건 왕조를 겨냥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교회를 겨냥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곳곳에서 앙시앵 레짐을 상징하는 가톨릭교회를 습격하고 성상을 파괴했다. 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혁명에 극렬 저항했다. 가톨릭교회는 교종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분쇄시키기 위해 가톨릭 군주들의 군대 파병을 요청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내세워 반혁명 선동을 일삼았다. 프랑스 혁명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가톨릭교회는 시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란이 방데 반란이다. 방데 반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 진압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1792년 ~ 1802년)
선전포고
프랑스 혁명 사상의 전파를 염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지배계급들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필니츠 선언》과 왕당파와 망명 귀족(에미그레: 이민이라는 의미)의 선동 활동은 혁명 정부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받아들였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양국은 1792년 2월 대(對)프랑스동맹을 체결하여 혁명정부를 압박하였다. 전쟁에 대한 각 계파 간에 계산은 달랐지만 모두 전쟁을 원했다.
푀양파는 전쟁에 승리할 경우 자코뱅을 제어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지롱드파는 전쟁을 유럽의 인민들을 해방시키는 성전이라 생각했다. 루이 16세와 측근들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될 경우에 군주권이 부활할 수 있는 은밀한 희망에서 전쟁을 원했다. 지롱드파 내각은 혁명을 계속하기 위해 대외 전쟁에 동의했다. 1792년 4월 20일, 루이 16세의 제의에 따라서 의회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 안을 열광적으로 통과시켰다. 프로이센에는 조금 늦은 7월 8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 장교들은 보수적인 귀족 계급이기 때문에 혁명 정부에 대한 협력에는 소극적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9,000명의 장교들 중 약 6,000명이 망명하였고 병사들은 정치 클럽에 참석하는 등 군기가 나태해졌다. 충원된 의용병들은 훈련과 경험이 부족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5월에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오스트리아와 첫 전투 중 자신들의 지휘관인 딜론 장군을 살해하는 하극상을 벌이는 등 사실상 프랑스 정규군은 와해수준에 놓였다.
왕궁 습격 사건
다급해진 입법의회는 선서거부파 성직자의 추방, 국왕의 친위대 해산, 지방출신을 포함한 연맹군(국민방위대) 창설 등의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6월 12일 루이 16세는 거부권을 행사하고 지롱드파의 대신들을 해임했다. 시민들은 루이 16세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반발했으며 아울러 패전의 원인이 국왕 일가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외국 군주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결국 파리 시민들이 6월 20일, 왕궁인 튀틀리 궁을 습격하였다. 비록 습격은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루이 16세는 심한 모욕을 당했다. 왕실은 또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런 일들은 상퀼로트의 출현과 지방에 있던 혁명을 옹호하는 국민방위대가 파리로 집결하면서 혁명이 급진적으로 흐르게 되었고 공공질서가 무너지며 발생했다.
상퀼로트
패전과 식량부족, 인플레 때문에 파리의 민심을 극도로 흉흉해졌다. 공채 아시냐는 가치가 40% 폭락했고 물가는 폭등하여 농민들은 곡식판매를 거부했다. 소요가 발생했고 도시민들은 당국에게 공정 가격제의 시행을 요구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도시에서는 상퀼로트가 등장했다. 이들은 귀족 남성들이 입는 퀼로트(무릎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대신에 긴바지를 입고 다녔기에 이런 이름이 부쳐졌으며 또 다른 특징은 붉은 모자와 긴 창을 들고 다녔다. 이들은 도발적인 활동을 통하여 공포정치를 조장하기 시작했다.
혁명을 급진적으로 이끌고 간 상퀼로트들은 대부분이 소생산자, 소상점주, 노동자 출신으로 혁명초기에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했던 무산계급이 다수였으며 수동적 시민으로 분류되었던 계층이다. 이들은 자본집중 반대, 직접 민주주의를 통한 민중의 정치참여, 자유보다는 평등, 국왕 경멸, 국왕의 거부권 폐지, 공화제등을 요구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급진적이고 과격했으며 이로 인해 상퀼로트는 대혁명 시기의 급진적인 민중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8월 10일 사건
튀일리 궁 습격, 카루젤 광장에서의 전투
7월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로 침입하자 정부는 조국의 위기를 전국에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프랑스 각지에서는 국왕 루이 16세가 행사한 거부권을 무시한 채 조직된 의용군들이 파리로 집결했다. 이때 마르세유의 의용병이 노래한 ‘라 마르세예즈’는 이후에 프랑스 국가(國歌)가 되었다. 7월 25일 프로이센군의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파리 시민들이 또 다시 부르봉 왕실을 모욕한다면 파리를 무자비하게 응징하겠다는 협박성 선언을 하였다.
이 선언은 역효과를 불렀는데, 파리 시민들은 왕실이 여전히 외국 군주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 패전으로 인한 절망과 왕실에 대한 분노가 뒤섞였고 흥분한 시민들에 의해 시위가 벌어졌는데, 소요사태가 커지더니 극단적인 수준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국가적 위기 속에 혁명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면서 입법의회는 이미 정국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상퀼로트, 자코뱅파, 코르들리에파, 지방에서 온 의용군 등이 파리를 장악하여 상황을 주도해 나갔다.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8월 10일에 왕궁인 튀틀리 궁으로 몰려가서 공격하였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루이 16세는 의회로 피신하였다. 의회도 침입을 받아 군중의 압박 속에 황급히 왕권을 중지시키고, 국왕 일가를 모두 탕플 탑에 유폐했다. 또한 당통(조르주 자크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년 10월 26일 ~ 1794년 4월 5일)은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이다. 샹파뉴에서 출생한 그는 로베스피에르, 마라와 함께 '프랑스 대혁명의 3거두'라고 불린다.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다가 혁명이 일어나자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웅변가로서도 알려졌으며, 특히 “적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하나에도 용기, 둘에도 용기이다.”라고 한 연설은 유명하다. 1790년 자코뱅 당에 가입하여 혁명 재판소를 설치하고 왕당파를 처형하였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와 뜻이 맞지 않는 일이 잦았고(지롱드 파 추방 후 1793년 이후는 당통파(관용파)를 결성하여 공포 정치의 폐지와 반혁명 용의자의 석방을 호소) 결국 1794년에 전세가 호전되기 시작하자 3월부터 시작된 혁명 세력 내의 중도파, 우파에 대한 탄압 중에 "외국인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반혁명 세력을 도와 준 혐의"로 혁명 재판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향년 35세. 당통 재판에서 특유의 웅변을 발휘하여, 판사에게 무죄를 설득하였지만, 변론을 방해하는 등의 압력이 가해져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았다. 단두대로 나서는 길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집 앞을 지나다가 "로베스피에르 다음은 귀하의 차례다!"를 외치며 끝까지 당당한 태도로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마지막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 내 머리를 나중에 민중에게 잘 보여 줘라. 이만한 머리는 좀처럼 없어!” 한편 그는 당대에도 왕당파에게서 뇌물을 받고, 왕당파에 혁명파의 정보를 넘겼다는 의심을 받았다.)이 이끄는 6인 임시내각을 만들고 빠른 시일 내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국민공회 구성을 약속했다. 이 사건은 군주제가 몰락하고 공화제가 시작되는 계기되었다.
9월 학살(1792년 9월)
파리는 상퀼로트들이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고 혁명은 급진화하여 민중혁명 단계에 들어갔다. 상퀼로트들에 의한 자치체가 형성되어 이들의 압력으로 왕당파 신문들이 폐간되고, 징발, 징집, 공정가격제가 실시되었다. 감시위원회, 비상 인민재판소가 설치되고 선서거부파 성직자들의 추방, 종교의식 금지, 이혼 허용 등의 법령들이 통과 되었다. 이런 가운데 프로이센군이 8월 19일 국경을 돌파하여 9월 3일 베르됭이 점령당했다. 프로이센군은 곧 파리로 들이닥칠 기세였다. 패전 소식에 파리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파리 침공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높아지자 자원 입대자가 증가하였다.
한편, 의용군의 출병 후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주의자들이 탈옥하여 파리에 남은 가족을 학살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았다. 전선에 나가기 전에 반역자들에 대한 숙청이 결정되었다. 9월초부터 모든 감옥을 돌아다니며 반혁명자로 의심되는 수감자들을 형식적인 즉결심판을 거쳐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또한 프랑스 전역의 반혁명 용의자를 체포하였고, 특별형사재판소의 약식 재판만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일이 자행되었다. 이때 살해된 사람은 대략 최대 1만 2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발미 전투(1792년 9월 20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베르됭을 점령한 후 파리를 목표로 아르곤느 계곡을 따라 이동하다가 뒤무리에와 켈레르만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군과 1792년 9월 20일 발미(Valmy)에서 조우하였다. 의용군을 포함한 4만 7천명의 사기 높은 프랑스 군과 프로이센군 3만 5천명이 8시간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 포병대가 집중 포격을 쏟아 부은 후 켈레르만의 보병부대가 프로이센군을 상대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프로이센군은 국경을 넘어 퇴각하였다. 발미 승리 후 프랑스 군은 국경을 넘어 사부아, 니스, 벨기에 등을 침공하였다. 1792년 11월에는 뒤무리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제마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발미 전투에 의용병으로 참가한 많은 하층민 계급(상퀼로트, 무산자 계급)은 승리로 인해 정치적 발언권이 더욱 커졌다. 상퀼로트는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한 자코뱅파를 옹호했고, 혁명은 극좌화되어 갔다. 자코뱅파에는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의 혁명전쟁의 시작과 함께 발행한 아시냐 지폐(교회의 토지 등을 담보로 한 불환지폐)의 증발(액면가의 57%로 급락)은 나중에 1794년 최고가격령 폐지와 함께 발생한 급격한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었다.
공화국 성립
국민공회
국경지역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9월 학살' 과 상퀼로트의 다소 과격한 활동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국민공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진행되었다. 재산이나 소득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기권율이 높았다. 시민들이 겁을 먹고 감히 투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749명의 새 의원들이 뽑혔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국민공회는 9월 21일, 군주제를 폐지하고 다음날 공화정을 선포함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1791년 프랑스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지됐다.
발미전투의 승리는 시기적절하게도 공화정의 출발에 큰 힘이 되었다. 국민공회는 어려운 상황에서 과업을 수행했다. 파리를 장악하고 코뮌을 통제하고 있던 상퀼로트의 압력과도 끊임없이 타협해야 했다. 초기에 국민공회를 지배했던 세력은 160석을 차지한 지롱드파였다. 이들은 공정가격제를 거부하고 경제 자유주의를 선호했다. 도시의 부유한 부르주아 출신인 지롱드파는 비상 재판소를 폐지하였고 공화정이기는 하나 국왕이었던 루이 16세의 목숨을 구하려 노력하는 등 온건한 개혁을 선호했다.
루이 16세 처형
공화국 정부는 루이 16세를 혁명 재판에 회부했다. 국왕이 전쟁 때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많이 제출되어 1793년 1월 14일 국민 공회는 찬성 387, 반대 334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했다. 그러나 찬성 중 26표는 집행유예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건부였다. 이 26표를 반대표로 의결하면 찬성 361 대 반대 360로 찬반 동수가 되기 때문에, 18일 집행유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다. 찬성 380 대 반대 310로 집행유예 없음으로 의결되었기 때문에, 사형이 확정됐다.
1월 21일, 2만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파리의 혁명 광장(현재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왕의 시신은 즉시 마들레느 묘지에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왕의 무덤이 알려질 경우에 왕당파의 순례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도 뒤로 손이 묶여 퇴비수레에 태워져 시내를 돈 이후 처형되었다. 국왕에게 사형 투표한 의원들은 "국왕 살인"으로 이후 보복을 받게 된다. 그들은 이후의 왕정복고에서 권좌에 복귀한 왕당파로부터 백색 테러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포 정치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 각국에 충격을 주었고, 영국 · 스페인 · 사르데냐 왕국도 반혁명에 서게 됐다. 또한 프랑스의 벨기에 합병은 영국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벨기에의 셸데 강 하구의 점령은 영국과 유럽의 무역에 대한 위협요소이기 때문이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각국의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혁명 정부는 “30만 명 모병”을 선포하고, 이것에 대한 반발로 왕당파가 부추긴 1793년 3월 방데 반란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 혁명군들 중에서도 탈영자가 늘어만 갔다. 프랑스는 벨기에에서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투도 패했다.
이러한 위기 외에도 지롱드파가 하층민의 식량 위기에 대해 아무런 정책을 취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면서 하층민의 분노가 폭발한다. 6월 2일, 하층민이 지지하는 자코뱅파가 국민 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7월 13일 자코뱅의 지도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장 폴 마라(1743년~ 1793년.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인으로 급진적인 인물. 자코뱅 클럽의 산악파에 참가하여 공포 정치를 추진.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후 ‘인민의 벗’이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사회 변혁에 미진한 정부를 비판하고 하층민을 지지했다.)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을 당하는 등 테러리즘도 연발하여 프랑스 정세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코뱅 당은 독재 정치를 시작한다.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통해 공포 정치를 했고, 반대파를 차례로 단두대로 보냈다. 로베스피에르는 당통, 에베르, 라부아지에, 카미유 데뮬랭, 뤼실 두플레시 등 에베르 파와 당통 파를 숙청했고, 1793년 7월, 농민에 대한 토지의 무상 분배 등 자기의 이상으로 하는 독립 소생산자에 의한 공화제의 수립을 목표로 했다. 법에 의한 보호와 신체의 자유, 소유의 권리를 담은 “인권 선언”은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자코뱅파는 8월 23일에 “국가총동원”을 선포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정돈하고 외국의 간섭 전쟁에 반격에 성공했다.
아시냐의 지불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농민과 상인들은 수확과 상품에 대해 신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가택수색과 징발이 빈발했고 밀고자들에게는 포상금을 지급했으며 혐의만으로 체포가 가능했다. 1794년 6월에 제정된 일명 《프레리알 22일 법》으로 인해 법률조력과 증인심문이 폐지되고 선고는 무죄와 사형, 이 두 가지 판결로 축소되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오를레앙 공작, 뒤바리 부인, 지롱드파 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수많은 반대파와 반혁명 혐의자들이 약식재판만으로 기요틴에서 참수되었다.
이처럼 프랑스 본토에서는 공포 정치가 진행되었지만, 한편 산토도밍고(현재 아이티)에서는 1793년 8월 29일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된 국민 공회 의원 레제 프리시테 손토나가 노예 제도의 폐지를 독단으로 선언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파는 1794년 2월 4일 국민 공회에서 푸뤼비오즈 16일 법을 통과, 서구 세계 최초의 식민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다. 이렇게 루이지애나, 기아나, 산토도밍고(현재 아이티),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등 대륙의 광대한 지역에서 《흑인법》 아래 농장 농업에 묶여 있던 흑인 노예는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다. 이것은 영국에 저항하고 있었던 산토도밍고의 흑인 실력자 투생 루베르튀르의 프랑스 복귀를 이끌어내는 등 자코뱅파를 통해 자유와 평등이 실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테르미도르 반동
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완고하게 관철시키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혁신 정책은 노동자의 지지를 얻었으나 부르주아들과 토지를 얻은 농민들은 혁명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반대파는 1794년 7월 27일(혁명력 2년) 측근인 생 쥐스트와 함께 참석한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의장 조제프 푸셰, 데르브와와 랑베르 탈리앵, 비요 바렌 등에게 탄핵을 당한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장내에서 탈리앵 등이 “폭군을 타도하자!”라는 연설을 하였으며, 로베스피에르 파의 체포를 요구하여, 오후 3시 로베스피에르, 쿠통, 생 쥐스트 등의 체포 결의가 통과했다. 다음 날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 등 22명은 자신들이 애용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평전 《조제프 푸셰》에서 테르미도르 반동 이전에는 "혁명은 모든 정당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고 모든 책임을 묵묵히 떠맡았던" 반면 반동 이후에는 "혁명은 부당한 일을 한 적도 있다는 것을 소심하게 인정하고 지도자들은 혁명을 부정하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총재 정부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인 1795년에 국민공회는 공화력 3년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재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에서 입법권을 갖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총재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반대파들이 일으킨 반란을 직면하게 되었다.
1795년 10월 5일 반대파가 일으킨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대파의 반란을 진압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후 이집트 원정과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총재정부는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민심을 잃었다.
통령 정부
마침내 나폴레옹은 1799년 브뤼메르 18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여 제1 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프랑스 혁명으로 태어난 프랑스 제1공화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시작된 프랑스 최초의 제정으로 인해 10여년 만에 단명하며 막을 내렸다. 또한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혁명으로 붕괴된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다. (부르봉 왕정복고)
식민지 노예해방
카리브 해의 산 도밍고(현재 아이티 공화국)는 흑인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설탕, 커피, 코코아, 담배를 생산하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당시 전 유럽 수요의 절반 이상을 공급하여 프랑스에 막대한 이익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소식을 전해들은 50 여만 명의 흑인노예와 혼혈인들이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을 산 도밍고에도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흑인들은 이에 무력으로 저항했다. 1791년 8월 22일에 부두교의 고위성직자 투생 루베르튀르가 흑인 노예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다. 1개월간의 혈전으로 백인 1천명, 흑인 1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많은 농장이 파괴되었으나 흑인들의 승리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정부와 전쟁 중이던 영국이 개입하여 함대를 파견했으며 스페인도 침공하였다. 침공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프랑스에서 파견된 대표는 산 도밍고에 있는 물라토(혼혈인)와 흑인 모두를 자유인으로 선포하며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가지도록 하였다. 1793년 8월에 산 도밍고의 저항군은 영국함대를 격퇴시켰다. 산 도밍고 흑인들의 승리는 전 식민지로 확대되었다. 1794년 2월 4일 프랑스 국민공회는 모든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제의 폐지를 선언하였다.
이후 산 도밍고는 프랑스와 갈등 끝에 프랑스 관리들을 몰아내고 1801년 7월에 헌법을 제정하며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제1통령 나폴레옹은 1801년 11월에 3만 명의 원정대를 파견하여 식민지 재탈환과 노예제를 부활시키려 했다. 아이티(산 도밍고)는 투쟁 끝에 프랑스 군을 몰아낸 후 1804년 1월1일 정식으로 독립하였다. 이로써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탄생하였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독립하였으며,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시작된 아이티 혁명과 독립은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 노예 반란, 중남미의 탈식민지와 노예제도 폐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혁명 정신
1789년 혁명 초기부터 혁명의 슬로건은 자유와 평등, 박애였고, 이러한 혁명 과정에서 발간된 여러 기록물에서는 세부적인 권리와 당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에서는 자유와 평등, 권리로 표현된 경우도 있고,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혁명 슬로건에 부수되는 당면 문제들이 거론되어 있다. 선언문 제2항에서 “자유와 소유권,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혀 자유와 소유권, 안전(생존권), 저항권을 천명하였다. 널리 확산된 혁명 정신의 여파로 다양한 계층에서 분출된 수많은 요구들이 혼란의 와중에서 수시로 반영되었고 1793년에 제정한 '프랑스 헌법'에는 자유와 평등, 안전, 소유권을 말하였고(특히 제8조는 안전과 인격, 권리 그리고 재산이 거론되었다.), 1799년 12월 15일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는 “소유권,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거룩한 권리”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 1794년 〈방토즈 법령 시행규칙〉에 대한 생 쥐스트의 기록이나 1795년 총재 정부 헌법에서도 혁명의 목표들은 다양하게 나타나있다. 혁명 정신과 관련하여“박애”를 올바르게 명시한 기록은 1793년 파리 시 집정관 회의이며, 다음과 같은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 1793년 파리 집정관 회의
한편,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속에는 르네상스 이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존중, '인간존엄'이라는 천부인권 사상이 전제되어 있고 이는 곧 인도주의, 박애주의와 연결되어 이미 혁명정신인 우애, 박애정신을 당연히 포함한다고 하겠다.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 박애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프랑스 7월 혁명>
1830년 샤를 10세는 해외 원정을 단행하여 군사력을 과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알제리로 출병했다. 이는 국회의원 선거를 노린 시위이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새로 선출된 의원은 반대파가 압도적이었다. 이에 그는 아직 소집되지 않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투표권 대상자를 더욱 제한하는 새 선거법을 도입해 재선거를 치르려 했다.
이에 국민들이 맹렬히 항의하며 7월 28일 파리 시내 도처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라파예트가 이끄는 공화당원들의 무력 봉기가 일어나 국왕군과 격돌했다. 온건한 자유주의자는 1789년이 재현될까 봐 두려워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샤를의 먼 친척이자 대혁명 때 혁명파로서 활약한 오를레앙공의 아들 루이 필리프(작중에는 루이 필립으로 표기한다.)를 국왕 대행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샤를은 국왕군이 점차 혁명군 쪽으로 전향하는 추이를 보고 사태의 중대성을 파악하여 칙령을 취소하고 대신을 파면하는 한편 손자에게 양위를 선언하면서 퇴위했다. 혁명 세력은 샤를의 퇴위만을 승인하고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정식 인정했다. 그는 국민 선거에 의거해 선출되었다는 명목으로 ‘국민의 왕’이나 혁명의 초연 속에서 왕이 되었으므로 ‘바리케이드의 왕’으로 불렸지만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으면서도 정치상 성과를 빼앗긴 공화주의자들에게는 불만스러운 왕이었다. 그가 수행한 일은 입법부에 법률안을 제출할 권리를 인정하고 선거 제한을 완화시킨 정도에 그쳤다.
<영향>
이 혁명의 결과 성립된 왕정을 7월 왕정이라 부른다. 7월 왕정은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경향을 띄었으며 이는 결국 18년 뒤의 2월 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프랑스 2월 혁명>
프랑스 2월 혁명(French Revolution of 1848, February Revolution)은 1848년 혁명의 한 흐름으로 프랑스에서 1848년 2월 22일에서 24일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다. 의회 내 반대파가 일으켰으며, 이 사건으로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이 해산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루이 필리프 1세가 입헌 군주로서 즉위하였지만, 입헌 군주정은 소수 부유한 지주층이 권력을 잡은 체제였다. 프랑스의 산업 혁명으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지는 선거법의 개혁을 요구하고 민주적 입헌정과 공화정을 갈망했다. 한편 근대공업의 성립과 함께 노동자 계급이 성장, 그 비참한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을 반영하여 사회주의 사상도 점차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1847년에 성립된 기조 내각이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했기 때문에 개혁파는 ‘개혁연회(改革宴會)’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847년 불황은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미 1846년의 소맥 흉작은 농민 폭동을 일으켰는데, 도시의 식량 부족과 물가 오름은 생활을 압박하고, 중소기업 도산으로 실업 증대도 겹쳐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경제 공황에 대해서도 정부는 아무런 타개책도 강구하지 못했고,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의 전국 개혁연회에 대한 금지령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튿날 기조 내각이 사임하였으나 민중의 폭동은 가라앉지 않고 격렬한 시가전으로 확대되었다. 24일 왕이 퇴위하였다.
2월 혁명 결과 루이 필리프는 영국으로 망명하고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공화주의파와 루이 블랑 등의 사회주의파가 대립했으며 무산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국립작업장(Atelier nationaux)이라는 조직이 생겨났다. 1848년 4월 말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를 실시했는데, 이때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낙선했다. 1848년 6월, 정부가 국립작업장을 폐쇄하자 많은 노동자들이 바스티유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였고 정부는 카베냐크(Cavaignac) 장군을 보내 시위를 무참히 진압했다. 그동안에 은행가·대지주·산업자본가들이 힘을 되찾아 질서당을 결성, 온건한 헌법을 의회에서 승인하게 했다. 앞선 혁명으로 부유층은 떠났어도 다시 기득권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사회는 다시 혼란에 빠졌고 사람들은 강력한 힘으로 프랑스를 이끌던 나폴레옹에 향수를 느꼈으며 그 결과, 남성 보통 선거의 도입으로 농민들이 선거권을 가지게 된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보나파르트가 승리하였고 제2공화정이 성립되었다. 농민들은 나폴레옹 1세의 영광을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다시 재현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제 2제정시대를 열었으며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2월 혁명은 7월 혁명보다 유럽 사회의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을 완벽히 바꾸어 새롭게 하는 변화를 몰고 왔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3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추방되고 빈 체제가 붕괴되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통일 운동이 일어나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고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통일을 논의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당이 등장하였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
클레멘스 벤첼 로타어 폰 메테르니히비네부르크 추 바일슈타인 후작(독일어: Klemens Wenzel Lothar Fürst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 1773년 5월 15일 - 1859년 6월 11일)은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당대의 가장 중요한 외교가였다.
명문 귀족 출신으로 프랑크푸르트, 마인츠에서 공부하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네덜란드 총독으로 있는 아버지를 도와 혁명을 막는 데 힘썼다. 1803년 드레스덴 주재 공사를 거쳐, 프랑스 대사가 되었다. 1809년 오스트리아·프랑스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하였다.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자 유럽 문제를 논의하는 빈 회의의 의장이 되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정통주의를 제창하고, 나폴레옹이 파괴한 유럽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주로 논의했다. 이때 능숙한 외교 정책으로 오스트리아의 위신을 회복시켰다. 빈 체제의 목적은 프랑스 혁명 즉, 나폴레옹의 전성기 이전의 상태로 유럽을 되돌리는 것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극력 반대하여 철저한 보수 정치에 의한 질서 유지를 지향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영내에 다수의 이민족이 사는 복합국가였다. 따라서 메테르니히는 자유주의의 침투와 제휴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국내에 대두할 때 국내의 분열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독일의 통일을 열망하는 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통일 운동의 지도권을 프로이센에 빼앗기지 않고 오스트리아 중심의 통일을 실현하고자 독일 연방을 조직, 이를 주도하려 했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루이 18세가 복위했으며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러시아 4국의 동맹을 결성했다. 동시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했다.
그는 보수적이어서 프랑스 혁명이나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동시에, 독일 및 이탈리아의 국민적 통일을 두려워했으며, 신성 동맹을 이용하여 제국의 자유와 통일 운동에 무력적인 간섭을 하였다. 1848년 프랑스에 2월 혁명이 일어나 빈 체제가 붕괴되며 그는 의장 자리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영국에 망명하였다. 1851년 귀국하여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정치적 상담 역할을 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2. 서투른 봉합(縫合)
그러나 현인들의 일이 다르고 수완가들의 일이 다르다. 1830년의 혁명은 이내 멈추었다. 수완가들은 스스로 정치가라 칭하며 혁명의 좌초를 분열시켰다. 이들은 시시한 인간들이며 배신자들이다. 이들은 혁명을 희석시킨다. 두려움을 조장하고 혁명의 광휘를 가리고 시간을 끌며, 감로주를 제공한다. 1830년의 혁명은 이미 영국에서 1688년에 적용되었던 이론을 실행했다.
혁명을 중도에서 저지하는 계급은 중산계급이다. 그들은 만족에 도달한 이익이기 때문이다. 정지, 라는 이 말을 나타내는 한 사람이 그들에게 필요했다. 그는 루이 필립 도를레앙이었다. 그 이백스물한 명의 인사들이 루이 필립을 왕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반(半)왕위를 전(全)왕위에 대치한 것이 1830년의 업적이었다. 수완가들의 일은 절대적 권리 밖에서 이루어졌다. 절대적 권리는 외쳤다. ‘나는 항의한다.’라고.
3. 루이 필립
혁명의 일시적 사라짐은 결코 포기가 아니다. 물론 혁명에도 잘못된 생각이 있고, 중대한 착각들도 보인다. 1830년은 탈선한 가운데도 행복했다. 왕은 왕위보다도 훌륭했다. 루이 필립은 희유한 인물이었다. 그는 1830년에 어울리는 귀족과 부르주아의 혼합이었다. 환자를 고치기 위해 피를 흘린 최초의 왕인 루이 필립을 왕당파는 비웃었다.
이 왕의 잘못은 너무나도 가부장적이고 소심하다는 것에서 배태된다. 그의 마음에는 프랑스혁명이 남긴 상흔이 뚜렷이 남아있었다.
그의 치하에서는 출판이 자유였고, 연설이 자유였고, 신앙과 언론이 자유였다. 루이 필립은 무대에서 나간 모든 역사상의 인물들처럼 오늘날 인류의 양심에 의해 심판 받고 있다.
절대적인 민주주의의 원칙 하에서 모든 것이 찬탈이 된다. 그러나 왕위의 자리를 놓고 볼 때 제일의 인군(仁君)이다. 그를 훼손한 것은 왕좌다. 왕을 빼면 착한 인간만 남는다. 그는 격무 중에도 밤새 형사소송을 재검토했다.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그냥 둘 수가 없었던 게다.
4. 토대 아래의 균열(龜裂)
루이 필립은 아무런 폭력도 쓰지 않고 직접적인 행동도 하지 않고 왕권에 들어간 사람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그에게 제공했고 그는 수락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의의 소유다. 루이 필립은 그의 소유에서 선의였고, 민주주의는 그 공격에서 선의였으므로, 사회적 투쟁에서 발생하는 많은 공포는 왕의 책임이 아니요, 민주주의의 책임도 아니다.
사회는 그러한 충돌 아래 출혈하지만, 오늘날 사회의 고통인 것이 후일엔 그의 구원이 될 것이니, 어쨌든, 투쟁하는 자들을 여기서 비난해야 할 것은 조금도 없다. 두 편 중 한쪽은 분명히 잘못 생각하고 있다. 권리는 민주주의에만 있지만,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심이다. 그러므로 이 무서운 충돌들은 세상 운수의 소관이다.
7월 혁명은 프랑스 밖에서 여러 왕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혁명은 바로 반항의 반대다. 혁명은 모두 정상적인 실행이므로 그 속에 합법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은 훼손되더라도 지속되고,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살아남는다. 혁명은 사고에서가 아니라 필연에서 나온다. 혁명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존재한다.
왕당파(부르봉 본가를 받드는 당파.)들은 그릇된 이론으로, 민주주의자들은 논리적 혜안으로 1830년 혁명을 공격했다. 과거와 미래의 공격 사이에서, 7월의 지배계급은 몸부림치고 있었다. 수세기 군주제와 싸우고 또 한편으로는 영원한 권리와 싸우는 그런 시기를 나타내고 있었던 게다.
대외적으로는 혁명이 아니라 군주제로 1830년은 유럽과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런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복잡함을 가중하는 것이었다. 그릇되게 요구된 화합은 흔히 전쟁보다도 더 무거운 부담이 된다. 프랑스에서 진보에 떠밀리고 있던 이 왕위는, 유럽에서는 그 걸음걸이가 느린 다른 여러 군주국들을 떠밀고 있었다. 끌려가면서 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국내에서는 빈곤, 무산계급, 임금, 교육, 형벌, 매음, 여성의 처지, 빈부, 생산, 소비, 분배, 교역, 화폐, 신용, 자본의 권리, 노동의 권리,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사회 위에서 증가하고 있었다.
본래의 정당들 외에 또 다른 운동이 나타났고 있었는데, 그들은 물질적 문제들을 거의 종교의 존엄성에 올려놓고 있었다. 사회주의자였다. 그들은 프랑스혁명에 의해 선언된 인권에 여성의 권리와 아동의 권리를 덧붙였다. 사회주의자들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는 부의 생산, 부의 분배 두 주요한 문제들로 귀결시킬 수 있다.
영국은 첫 째 것은 잘 해결하고 있으나 두 번째 것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이는 엄청난 부유와 엄청난 빈곤의 두 극단을 낳는다.
공산주의와 토지 균분법은 둘째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는데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들의 분배는 생산을 죽인다. 부를 죽이는 것은 부를 분배하는 것이 아니다.
양자의 해결이 결합되어 하나가 돼야만 해결이 가능하다. 부자를 격려하고 빈자를 보호하라. 빈궁을 절멸하라. 강자에 의한 약자의 부정한 착취를 종식시켜라. 무상의무교육을 주고 소유권을 폐지하지 않고 보편화함으로써 시민 누구나가 예외 없이 소유자가 되도록 소유권을 민주화하라. 이것이 사회주의가 사실들 속에서 찾고 있던 것이고 이것이 사회주의가 사람들속에서 그리고 있던 것이다. 탄상할 만한 노력들이었다. 성스러운 시도들이였다!
루이 필립은 발아래에 무시무시한 붕괴를 느끼고 있었지만 프랑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프랑스였으므로 그 붕괴는 박살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5. 역사가 모르는 역사의 근원적 사실
4월 말경 동요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1830년 이래 여기저기서 국부적인 작은 폭동들이 있었지만, 이내 진압되고 되살아나곤 했는데 이런 현상은 엄청 큰 동란이 있으리라는 징조였다. 프랑스는 파리를 보고 있었고 파리는 생 탕투안 문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로돈 거리 술집에서는 투쟁을 결의하는 장면들이 흔히 보였다. 그들이 돌려보는 팸플릿은 정부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었다. 어떤 주점에서는 혁명 위원을 선출하는 투표도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총알을 만들기도 했고, 검술을 배우기도 했다. 대낮에 대놓고 선동연설을 하는 자도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구호도 들렸다. 경찰들은 이런 것들을 수집하고 다녔다. ‘주요 두령’들은 따로 행동하고 있었다. 어떤 하부조직원도 그들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이따금 알 수 없는 지령들이 적힌 쪽지들도 보였다. 화약을 만들고 무장을 하는 조짐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인사처럼 ‘폭동은 잘돼 가나?’라고 인사했다.
혁명의 열기는 퍼져 가고 있었다. ‘민중의 벗 결사’에서 ‘인권 결사’가 태어났는데, ‘인권 결사’는 ‘행동 결사’를 낳았다. 그렇게 아래로 여러 결사,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ABC의 벗’ 결사는 뮈쟁 다방에서 모였다. 군대도 잠식당하고 있었다.
생 탕투안 문밖은 민중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어떤 때는 야만의 군중이, 어떤 때는 영웅적 군중이 튀어나온다. 야만. 그러나 그들은 사회의 진보를 위해 뛰어나온 것이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깔끔하고 우아한 문명인 보수 세력이 자리하고 있다. 나라면 이 문명의 야만인들과 야만의 문명인들 중 야만인을 택할 것이다.
우리는 완만한 경사의 진보를 원한다. 경사의 완화, 이것이야말로 신의 모든 정책이다.
6. 앙졸라와 그의 보좌인들
앙졸라는 그 무렵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싶어 일종의 비밀 조사를 했다. 그는 뜻밖의 일을 경계하자면서 성원들에게 구역을 나눠주어 사람들을 선동하도록 지시했다. 한 구역이 빠졌는데 앙졸라는 마리우스를 보낼 계획이었지만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랑테르가 자신이 가겠다고 하자, 앙졸라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랑테르는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졸랐고 끝내 앙졸라는 그 뜻에 동의해주었다.
성원들이 각자의 임무를 위해 자릴 뜨고 앙졸라는 그랑테르를 지켜보기 위해 갔다. 그는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Ⅱ. 에포닌
1. 종달새의 들
자베르가 자릴 뜨자, 마리우스는 쿠르페락의 집으로 갔다. 다음날 고르보의 누옥에서 마리우스는 짐을 뺐다. 해서 자베르는 진술을 듣기 위해 왔다가 허탕을 치고 말았다. 부공 할멈은 마리우스를 간밤의 도둑들과 한패라 생각했다.
마리우스는 두 달째 쿠르페락 집에 있었다. 그는 쿠르페락에게 빌려서 테나르디에 앞으로 매주 5프랑씩 포르스 감옥의 사무소에 보냈다. 그는 괴로웠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그녀가 ‘종달새’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일마저 놓아버렸다. 빈궁이 다시 오고 있었다. 사색은 지성의 노동이고 몽상은 지성의 향락이다. 사색 대신 몽상을 하는 것은 음식에 독을 섞는 것과 같다. 마리우스의 뇌리에는 그녀에 대한 몽상뿐이었다.
어느 날 마리우스는 산책을 하다가 황량한 곳에 이르러 장소의 이름을 물었다. 그곳은 ‘종달새의 들’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는 날마다 그곳에 왔다.
2. 감옥에서 싹트는 범죄
자베르의 고르보 누옥 작전은 완전하지 않았다. 도망친 포로가 그랬고 몽파르나스도 잡지 못했다. 몽파르나스는 집 아래에서 망을 보던 에포닌을 만나 그녀를 데리고 딴 곳에 갔던 것이다. 게다가 클라크수는 포르스 감옥으로 가는 도중 사라져버렸다. 그 녀석은 분명 양다리(범죄와 경찰)를 걸치고 있는 놈이리라. 파트롱 미네트의 놈들은 감옥에서도 무언가 작당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었다. 브뤼종은 바베에게, 바베는 마뇽이란 계집애를 통해 쪽지를 전달한다.
테나르디에의 딸들은 증거가 없어, 에포닌, 아젤마는 석방되었다. 마뇽이 에포닌에게 브뤼종이 바베에게 보낸 쪽지를 건네주었다.
브뤼종이 꾸미던 범죄는 좌초되었다. 하지만 브뤼종의 계획과는 완전히 관계없는 결과를 후에 낳게 된다.
3. 마뵈프 영감에게 나타난 유령
마뵈프 영감도 형편이 계속 어려워지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에게 해괴한 유령이 나타났다. 마뵈프 씨는 정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가물었기에 물을 길어 정원에 주려고 우물로 갔다. 기운이 없어 두레박 사슬을 벗길 수가 없었는데, 유령 같은 계집애가 나타나 자기가 정원에 물을 뿌려드릴까요, 라고 묻는 게 아닌가. 고맙다며 해드릴 게 없다는 마뵈프에게 그녀는 할 수 있는 게 있다면서 마리우스 씨가 어디 사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그는 집은 몰랐으나 ‘종달새의 들’은 알았다.
4. 마리우스에게 나타난 유령
그날도 마리우스는 ‘종달새의 들’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에포닌이 그 앞에 나타났다. 에포닌은 지난 약속을 들추었다. 에포닌은 그 아가씨의 주소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거리와 번지는 몰라도 데려다줄 수 있다고 가자고 했다. 그 전에 마리우스는 에포닌에게 그녀의 집을 아버지에게 절대 알려주지 말란 다짐을 받아냈다.
길을 가며 에포닌은 뭐든 해주겠다던 약속을 마리우스에게 상기시켰다. 마리우스는 5프랑을 그녀 손에 쥐어주었으나 그녀는 돈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서글픈 얼굴로 ‘당신 돈은 바라지 않아요.’라고 했다.
Ⅲ. 플뤼메 거리의 집
1. 비밀의 집
18세기 법원장이 첩살림을 살던, 긴 비밀통로가 있는 집이 있다. 땅을 나눈 담으로 보이는 그 사이에 포석이 깔린 고불고불한 길이 500미터나 이어진 비밀 출입구가 있는 집이었다. 바깥에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고 새나 알고 있을 법한 비밀 길이었다. 1829년 10월, 나이가 지긋한 남자 하나가 그 집을 세냈다. 그는 처녀 하나와 늙은 하녀 하나를 데리고 와서 입주했다. 남자는 장 발장이고 처녀는 코제트였다. 하녀는 투생으로 늙은 말더듬이였다.
장 발장은 프티 픽퓌스 수녀원을 아무 일 없이 떠나왔다. 떠난 이유는 코제트의 자유의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그곳에 두면 필시 원하든, 원하지 아니 하든 수녀가 될 터였다. 수녀원에 들어간 지 오 년만이었다. 포슐르방 영감이 죽었을 때 약간의 돈을 기부하고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파리에서 세 군데의 아파트를 세내어 오가며 지냈었다.
2. 국민병 장 발장
코제트는 식모와 함께 별장을 차지했다. 또래의 처녀들답게 방을 치장하고 화장도구도 들여놨다. 일이층 모두 난방을 잘해놓고 있었다. 장 발장은 안마당에 있는 문지기 집 같은 데서 살았다. 소박한 그의 방에는 그가 늘 챙기는 소중한 가방 하나와 단출한 가구 뿐이었다. 불은 때지 않고 살았다.
코제트와 장 발장은 늘 산책을 나갔다. 뤽상부르 공원 인적이 드문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 주일마다 생 자크 뒤 오 파 성당의 미사에도 데리고 다녔는데 사는 곳에서 멀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다닌 것이다. 그곳은 아주 가난한 구역으로 그는 그곳에서 많은 보시를 했다. 그러다가 테나르디에의 편지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기꺼이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다녔지만 어떤 사람도 플뤼메 거리의 집에는 들이지 않았다.
연금 생활자 포슐르방(장 발장) 씨는 국민병이 되었기 때문에 소집 영장을 받았다. 그가 프티 픽퓌스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며 일종의 존경까지 받게 되면서 보초를 서기 적당한 사람으로 비쳤던 탓이다.
일 년에 서너 번씩 장 발장은 군복을 입고 경비 보초를 섰다. 면제 나이가 가까웠지만 그는 쉰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외출할 때는 노동자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차양 달린 모자를 깊숙이 눌러써서 얼굴을 가렸다. 이 세 가족들은 바빌론 거리 쪽의 비밀문으로밖에 출입하지 않았다. 플뤼메 거리 쪽에서 본다면 그들이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을 알아채기란 어려웠다.
장 발장의 플뤼메 거리 생활은 이랬다.
3. 자연의 개체와 합체
장 발장 집의 정원은 그저 내버려두었기에 특이하고 매력적인 것이 되었다.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내버려둔 것이 오히려 이목을 끌게 되었다. 완전한 자연이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4. 쇠살문의 변화
방탕한 비밀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졌던 정원이 다시 순결을 지키는 정원, 에덴동산이 되었다.
코제트는 열네 살. 수녀원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이 세상 모든 수녀를 합쳐도 어머니만 못하다. 장 발장은 모든 애정과 정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순진이라 불리는 커다란 무지와 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지식이 필요한가?
처녀를 정열에서 준비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수도원은 사람의 마음을 억제하는 억압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뤼메 거리의 집은 코제트에게 평온하면서도 위험한 것이었다. 코제트는 장 발장이 너무 좋았다. 그녀는 늘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코제트는 어릴 때 일을 어렴풋이 기억했다. 어떤 구렁텅이에서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장 발장이란 것만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장 발장은 그녀가 처녀가 되고 나서는 팡틴의 일을 좀처럼 알려주지 않았다.
장 발장은 코제트와의 생활이 더없이 행복했다.
5. 장미는 제가 무기임을 깨닫고 있다
어느 날 코제트는 거울을 보다가 자신이 제법 예쁜 것 같이 느껴졌다.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이는 코제트를 혼란 속에 던져 넣는 일이었다. 왜냐면 여태 그녀는 스스로가 못생긴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예뻤다. 살결은 희어졌고 머리칼은 윤이 났으며 푸른 눈동자는 반짝였다. 그런 과정을 바라보는 장 발장은 비통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코제트의 사랑을 잃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자의 아름다움이 무서운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이는 아름다워지는데 자신은 추하게 늙어간다.
코제트는 옷차림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행인의 예쁘다는 칭찬은 그녀에게 교태를 남겨주고 갔다. 코제트는 곧 바빌론 거리에서 가장 예쁜 여자의 하나가 되었고 파리에서 옷을 가장 잘 입는 여자가 되었다. 이런 변화를 장 발장은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코제트는 엄마가 없는 표가 많이 났다. 처녀는 능직 옷을 입지 않는 게 관롄데 그런 것은 몰랐다.
아빠와 있는 것이 제일 좋다던 코제트는 이제 외출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코제트는 자신의 미모를 앎으로써 그것을 몰랐을 때의 우아함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에 잠긴 진지한 매력에서 잃은 것을 되찾았다. 마리우스가 여섯 달 뒤, 뤽상부르 공원에서 그녀를 다시 본 것이 이 무렵이다.
6. 전투가 시작되다
코제트는 정열을 불사를 준비가 되었다. 운명은 숙명적으로 마리우스와 그녀를 접근시켰다. 코제트 역시 마리우스의 눈길에 반했던 것이다.
다가오지 않는 마리우스에게 코제트는 분한 마음을 느꼈다. 청년에게 진실한 사랑의 첫 징후는 소심이고 처녀에게는 과감성이다. 코제트가 먼저 다가간 날 그녀의 시선은 마리우스를 미치게 만들었고, 마리우스의 시선은 코제트를 떨리게 했다. 이날부터 그들은 열렬히 사랑했다.
코제트는 어떤 개념, 편견도 가지지 않고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에게 나타난 사랑은 멀리 떨어져 있고 이상 속에 머물러 있는 하나의 공상이었다.
코제트는 조금씩 여자가 되고 자기의 아름다움을 의식하고 사랑을 모르고서, 아름답고 요염하게 발달해 가고 있었으며 순진하게 교태도 부렸다.
7. 하나의 슬픔에 하나 반의 슬픔
장 발장도 마리우스의 존재를 눈치 챘다. 한쪽에서 무언가 지어지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무엇인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느끼듯. 장 발장은 진심으로 마리우스를 미워하고 있었다.
코제트는 자신의 감정을 잘 감추어 장 발장도 깜빡 속았으나 마리우스는 그렇지 않았다. 장 발장은 은연중에 마리우스와 전쟁을 시작했다. 마리우스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장 발장은 산책 시간을 바꾸고 벤치를 바꿨으며 손수건을 놓고 가는가 하면, 혼자 오기도 했다. 마리우스는 무모하게도 그 모든 허방다리에 빠졌고 장 발장이 품고 있던 모든 의문점들에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장 발장은 코제트에게는 속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우스 혼자 코제트에게 반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 발장은 마리우스를 도둑놈을 바라보는 개처럼 바라보았다. 그의 미행을 안 날, 그는 퓔뤼메 거리로 돌아갔다. 코제트는 자기 마음이 들킬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침울해졌고 이에 장 발장도 우울해졌다. 쌍방이 다 무경험의 싸움이었다.
장 발장은 수녀원을 그리워했다. 코제트는 허탈한 상태였다. 서로의 사랑으로 의지해왔던 두 사람이 지금은 서로의 곁에서, 서로 상대방의 탓으로, 그렇다는 말도 못하면서, 미소 지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8. 사슬에 얽힌 죄수들
둘 중 더 불행한 쪽은 늙은 장 발장이었다. 그는 어린애 같아졌다.
그들은 아침 산책을 멘 문 바깥 들 쪽으로 나갔다. 1831년 시월의 어느 날 아침, 꼭두새벽, 장 발장이 산책을 나와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코제트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에게 알렸다. 수레가 일곱 대가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여 지나고 있었는데 수레 위에는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모든 참상들이 이 행렬 속에 섞여 있었다. 호위하던 사람들은 수레 위의 사람들에게 욕설하고 매질을 해댔다. 그 행렬은 죄수 이송 행렬이었다. 장 발장은 굳어버렸다. 삼십오 년 전에 자신도 이 성문을 지났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코제트는 그 죄인들이 무서웠고, 장 발장에게 그런 혐오를 이야기했다.
그 일을 잊게 하기 위해 축제에도 다녀오고 했지만, 코제트는 장 발장에게 징역이 무엇이지 물었다.
Ⅳ. 아래에서의 구원이 하늘에서의 구원이 될 수 있다
1. 밖에서의 상처, 안에서의 치유
그들의 생활은 점점 침울해져 갔다. 그들에게 남은 소일거리는 자선활동 뿐이었다. 그들이 종트레트의 집에 방문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방문 다음 날, 장 발장은 아침에 나타났다. 그는 상처 때문에 신열이 나 한 달 동안이나 외출하지 못했다. 의사를 못 부르게 해, 코제트가 보살폈는데, 장 발장은 이것에 오히려 행복해 했다. 상처가 낫자, 그는 산책을 다시 시작했다.
2. 플뤼타크 할멈의 서슴없는 사건 해석
어느 날, 소년 가브로슈는 배가 고파서 마뵈프 씨의 정원 과일 저장고를 털려고 하다가 마뵈프 씨와 플뤼타크 할멈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플뤼타크 할멈은 집세도 독촉이고, 아무도 외상을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마뵈프는 돈이 없었다.
담 아래 쪼그려 동정을 살필 때, 순박한 노인 하나와 몽파르나스가 그곳에 나타났다. 아무래도 몽파르나스가 순박한 노인을 노리는 듯 하여 소년은 동정심이 일었다. 순식간이었다. 예상대로 몽파르나스는 노인을 덮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노인이 몽파르나스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가브로슈는 신이 났다.
노인의 손아귀에서 몽파르나스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노인은 몽파르나스에게 열아홉 살이란 나이를 듣고는, 나쁜 짓을 하면 어떤 후과가 따를 것인지 말하고 바른 선택을 하며 살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가라고 하며 지갑을 주었다. 노인은 장 발장이었다.
어리둥절한 몽파르나스는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가브로슈가 장 발장이 준 지갑을 몽파르나스의 주머니에서 슬쩍했다. 가브로슈는 지갑을 마뵈프 영감 집 안으로 던져버리고 달아났다. 지갑은 영감의 발 위에 떨어져 졸던 마뵈프가 깼다. 그 속엔 잔돈 몇 푼과 나폴레옹 금화(20프랑짜리) 여섯 닢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플뤼타크 할멈에게 보여주자, 할멈은 이건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Ⅴ. 시종이 같지 않다
1. 고독과 병사(兵舍)
코제트의 열병은 조금씩 나아져갔다. 그즈음 코제트는 매일 정원 쇠살문 앞을 같은 시간에 지나가는 젊은 창기병 미남 중위 한 명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쪽에서도 코제트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테오뒬 질노르망이었다.
코제트의 속에는 가라앉아 있는 정열이 있었다. 해괴한 사건 하나가 돌발했다.
2. 코제트의 공포
4월의 전반에 장 발장은 여행을 했다. 아주 오랜만에 하루나 이틀, 고작해야 사흘 정도 다녀오는데 보통 집에 돈이 떨어졌을 때였다. 장 발장이 이번에는 사흘을 기약하고 길을 나섰다.
저녁 10시, 코제트가 홀로 객실에 있는데 집안 정원에서 사람 걷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층으로 가 밖을 내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이튿날 어둑해질 무렵 그녀는 정원을 소요하고 있었다. 그날도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숲에서 나는 소리일 뿐이라 생각했다. 코제트가 돌층계로 가려고 잔디밭을 건너려던 순간 둥근 모자를 쓴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코제트는 얼어붙었다. 이윽고 그녀는 과감히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담하게 정원을 샅샅이 뒤졌지만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말 오싹해졌다. 그 이튿날 장 발장이 돌아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장 발장은 아무것도 아닐 거라 코제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장 발장은 쇠살문을 살피고 밤에 정원에서 보초를 섰다.
셋째 날 밤, 오전 1시경 큰 웃음소리가 나더니 코제트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둥근 모자를 쓴 그림자는 이웃집 지붕 위에 솟아 있는 뚜껑 달린 함석 연통이 만들어 낸 그림자였다.
장 발장과 코제트는 완전히 안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왜 그림자가 사라졌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새로운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3. 투생의 설명
정원 안에는 거리로 향한 쇠살문 옆에 돌 벤치 하나가 있었는데, 바깥에서 굳이 팔을 뻗으면 미칠 수 있는 거리였다. 4월 어느 날 저녁, 장 발장이 외출하고 없을 때, 코제트는 그 자리에 앉았다가 잠시 정원을 거닐고 돌아왔다. 그런데 벤치에 돌멩이 하나가 얹어져 있는 것이다. 무서워진 코제트는 감히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집안으로 피신했다.
코제트는 투생에게 문단속을 잘 해두었는지 물었고 확답을 받았다. 투생은 강도가 든 잔인한 신파극을 이야기해 코제트를 더 두렵게 만들고 만다. 문을 꼭꼭 잠그고 자면서도 그날 밤 코제트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혹시 착각했는지 아침에 다시 벤치에 가보았더니 돌멩이가 분명히 그 자리에 있었다. 밤의 공포는 낮의 호기심이다. 코제트는 돌멩이를 들춰보았다. 편지가 있었다! 소인도 주소도 이름도 없었다. 견딜 수 없는 매력이 코제트를 사로잡았다.
4. 돌 아래의 마음
장문의 편지에는 사랑의 예찬과 사랑에 빠진 자신의 감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중간에는 뤽상부르 공원 이야기도, 미사 이야기도 나왔다.(편지를 쓴 이가 마리우스임을 짐작케 해준다.)
5. 편지를 보고 난 코제트
편지를 읽으며 코제트는 몽상에 빠졌다. 편지를 다 보았을 때, 예의 그 장교가 지나갔는데, 코제트는 그가 흉하다고 생각했다.
이 열다섯 쪽의 원고는 그녀를 설레게 했다. 코제트는 편지를 보낸 사람을 직감했다. 모든 것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그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코제트였다. 코제트는 진정할 수 없는 정열을 느낀다.
6. 노인들은 때마침 외출하게 되어 있다
저녁때가 되어 장 발장은 외출했고, 코제트는 정장을 입었다. 코제트는 외출이 아니라 정원을 나가는 것이었다. 돌 벤치에서 둘은 만났다. 그는 수척하고 창백했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던 코제트가 어느 나무에 등이 닿았을 때, 그는 두려워 말라며 자기를 주섬주섬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천사라며 당신이 아니면 죽을 것 같다며 사랑을 고백했다. 코제트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가 안았다. 코제트는 그의 손을 잡아 편지가 있는 가슴께로 가져가 올려놓았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한 번의 입맞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를 얼마나 갈망했는지를. 가장 은밀한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한 시간 만에 서로의 영혼을 제각이 소유했다. 모든 말이 끝났을 때, 서로는 이름을 묻고 확인했다.
Ⅵ. 소년 가브로슈
1. 바람의 장난
1823년 이래, 테나르디에 부부는 또 다른 두 아이를 가졌는데, 둘 다 사내아이였다. 그래서 오 남매가 되었다. 테나르디에 부인은 딸들에게까지만 어머니였다. 그 부부는 아직 어린 두 아들을 털어 버리면서 이익까지 얻는 데 성공했다.
마뇽은 두 아이를 미끼삼아 질노르망 영감에게 연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던 여자다. 마뇽은 후두염이 유행할 때 하루에 두 아들을 잃었다. 다달이 80프랑의 돈을 잃은 것이다. 그래서 마뇽은 알고 있던 테나르디에의 두 아들을 다달이 10프랑을 주기로 하고 데려왔던 것이다.
테나르디에의 두 딸과 가브로슈는 두 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겨를조차 없었다. 빈궁 때문이었다.
마뇽은 미스 양이라는 영국출신 여자와 함께 살았는데, 악당들 축에서는 멋을 좀 부렸다. 아이들이 돈이었으므로 아이들도 잘 돌봤다. 그런데 테나르디에의 파멸은 마뇽의 파멸로 이어졌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 때 마뇽은 경찰에 연행되어버렸다.
두 아들은 마뇽이 남겼다는 쪽지를 받아 그 쪽으로 찾아가지만 종이를 잃어버리고 하염없이 길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2. 소년 가브로슈가 대(大) 나폴레옹을 이용하다
파리는 봄에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북풍이 꽤 자주 분다. 1832년의 봄, 이 북풍이 어느 해보다 더 지독하고 맹렬하게 불 때, 19세기 최초의 큰 돌림병, 콜레라가 발생했다. 사흘쯤 굶은 가브로슈가 이발소 앞에서 비누조각을 훔쳐 다른 이발관에 팔기 위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두 어린아이가 이 가게에 들어가 구걸을 했다. 두 아이는 쫓겨나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가브로슈가 쫓아갔다. 두 아이를 데리고 가던 가브로슈는 불쌍한 거지 소녀에게 숄을 건넸다. 두 아이는 자기 엄마가 미스 양과 함께 살았다고 말했다. 가브로슈는 아이들을 데리고 빵집에 가 빵을 사줬다. 가브로슈는 두 아이에게 곁말들을 가르쳐준다.
일행이 바스티유 방향으로 가다가 포르스 감옥쯤 이르렀을 때, 몽파르나스가 가브로슈에게 아는 체를 했다. 몽파르나스는 바베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바베가 탈출한 이야기도 덧붙였다. 연설을 듣고 얻은 지갑을 잃어버린 이야기도. 가브로슈는 애들을 데리고 코끼리 속에 자러 간다고 그에게 말했다.
바스티유 광장 바깥 해자 선창 가까이 나폴레옹이 만든 기이한 기념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목재와 석고로 만든 코끼리였다. 그들은 그 거상의 배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쓸모없다던 이 거상은 공공의 죄과를 감소시키는 데 이렇게 쓰이고 있었다.
잠자리에 누운 가브로슈는 큰애에게 왜 울었냐고 물었다. 가브로슈는 파리 거리의 건달생활, 말투를 알려주었다. 코끼리 안은 쥐들이 그득했다.
동이 트기 조금 전에 한 사내가 코끼리의 배 밑에까지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가브로슈가 코끼리 밖으로 나왔다. 사내는 몽파르나스였다. 몽파르나스는 가브로슈에게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둘은 빠르게 생 탕투안 거리 쪽을 향해 갔다.
3. 탈옥 사건
바베, 브뤼종, 괼메르, 테나르디에 사이에 탈옥 계획이 상의되었다. 가브로슈가 두 아이를 데리고 온 날 브뤼종, 괼메르가 탈옥에 성공했다. 바깥에는 그날 아침 탈주한 바베가 몽파르나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나르디에는 파수병에게 마취제 섞인 포도주를 먹이고 탈주했다. 벽 위에 고립되어 있던 테나르디에를 가브로슈가 기어올라 줄을 묶어서 내려오게 할 수 있었다. 아들과 아버지가 그렇게 만난 것이다.
테나르디에는 바닥에 내려오자마자 이제 우리, 어떤 놈을 잡아먹을까, 라고 씨우적거렸다. 브뤼종은 플뤼메 거리에 외딴 집을 빠르게 말했고 왜 안 된다는 거냐고 되물었다. 에포닌이 사정을 보고 마뇽에게 안 된다는 신호를 줬다는 것이다. 그들은 더 살펴볼 것을 이야기하고 헤어진다. 가브로슈는 아버지를 알아보았지만 테나르디에는 못 알아보았다. 가브로슈는 한동안 그의 아버지가 돌아봐주길 기다리다가 가버렸고, 바베가 테나르디에에게 그 애가 당신 아들 같다고 말해주었다. 테나르디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가 버렸다.
Ⅶ. 곁말
1. 기원
곁말(Argot)이란 무엇인가? 한 집단의 고유 언어로 민중과 언어라는 두 종류 아래서의 도둑질이다. 한 작자(빅토르 위고 자신)가 한 작품(한 사형수의 마지막 날) 속에 곁말을 말하는 도둑을 내놓았을 때, 반대가 끔찍했다.
나는 이런 반대를 이해 못한다.
그 말이 잔인하고 무서운 것임은 동의한다. 그러나 곁말을 외면하는 사상가는 궤양이나, 무사마귀를 외면하는 외과의사와 비슷하다. 언어의 한 사실을 조사하기를 주저하는 언어학자이고, 인류의 한 사실을 탐구하기 주저하는 철학자일 것이다.
곁말은 문학적 현상이자,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곁말을 비참의 언어다.
모든 계층, 성별, 직군, 학문 분야 등에는 곁말이라 이를 수 있는 말들이 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광의의 개념이고 그것을 누구나 인정하지는 않으리라.
모든 굴욕들과 비운들의 맨 끝에는 반항하고 투쟁에 들어가기를 결심하는 최후의 비참이 있다. 이러한 투쟁의 필요를 위해 비참은 하나의 전투어를 발명하는데, 이것이 곧 곁말이다.
그것이 장차 소멸할지라도 바라보고 연구하는 태도는 사회 관찰의 데이터를 넓히는 것이고 문명자체에 봉사하는 것이다.
곁말을 떠오르게 해서 무슨 소용인가? 나는 딱 한마디만 답하겠다. 사투리가 관심사가 될 만하다면, 그보다 더 주의하고 연구할 만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어떤 비참이 말한 언어다.
인간은 단 하나의 중심을 갖고 있는 원이 아니라, 사실과 사상이라는 두 개의 초점을 갖고 있는 타원이다.
2. 어원(語源)
곁말은 어두운 사람들의 언어다. 거기에는 명백한 징벌이 있다.
누가 인정하든 안 하든 곁말은 그의 어법과 그의 시(詩)가 있다. 그것은 하나의 언어다. 순전히 문학적인 견지에서 곁말의 연구보다도 더 흥미진진하고 더 무궁무진한 것은 별로 없다. 다소 깊이 파고 들어가면 곁말 속에 옛 프랑스 속어 아래, 프로방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지중해 여러 항구들의 말인 동방어, 영어, 독일어 등등이 발견된다.
곁말은 더 자연스럽다. 인간 정신에서 나오는 다른 어원을 가지고 있다. 첫째, 말의 직접창조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언어의 원시적 바탕이다. 둘째, 비유. 모든 것을 말하면서 모든 것을 감추고자 하는 언어는 형용이 풍부하다. 셋째, 임시방편이다. 곁말은 부패의 고유 언어이므로 빨리 부패한다. 노상 숨으려고 애쓰기에 남들이 알아듣는다 싶어지면 이내 변형되어 버린다.
이 기괴한 어법을 연구하고 파 들어가면 마침내 정상적인 사회와 저주받은 사회의 접촉점에 도달하게 된다.
곁말은 죄수가 된 언어다.
3. 우는 곁말과 웃는 곁말
곁말의 세계에서 사람의 생각이 갖는 갖가지의 형태들은 노래도, 야유도, 위협도, 모두 무기력하고 허탈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제 잘못을 아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엎드리고, 애원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엽 변화가 일어나 감옥들의 노래들이 거만하고 쾌활해졌다. 이것은 중대한 조짐이다. 이 침울한 계급의 옛 우울증이 스러진 것이다. 마치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 것처럼 일종의 가벼운 빛이 나온 것이다. 죄악감을 상실한 증거였고, 사상가와 명상가들이 부지중에 보내는 지지를 그들 속에서까지도 느끼고 있다는 징후였다. 18세기의 사상가들은 위대했지만 그 아래로 궤변들이 난무했다.
프랑스혁명은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선포하고, 부패를 일소하고, 시대를 정화하고, 민중에게 영광을 주었다. 프랑스혁명은 인간에게 제2의 영혼인 권리를 주었다.
혁명의 의의는 도덕적 의의다. 권리감은 발전하여 의무감을 발전시킨다. 만인의 법칙, 그것은 자유다. 로베스피에르의 정의처럼 자유는 남의 자유가 시작되는 데서 끝난다.
4. 두 가지의 의무, 경계와 희망
사회적 위험은 다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사회의 폐병, 빈궁이 있다. 이를 되풀이하는 데 지치지 말자. 불우하고 고통스러운 군중을 생각하고 도와주어라. 아낌없이 교육을 베풀라. 부를 제한함 없이 빈을 제한하라. 임금을 올리고 노고를 줄여라.
진정한 문제는 노동은 하나의 권리가 되지 않고서는 하나의 법칙이 될 수 없다.
진보 전체는 해결 쪽을 지향한다. 빈곤의 소멸은 단순한 수준의 향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과거는 강력해 마치 승리자 같다. 두려워 말자. 강물의 역류가 없듯이 사상의 역류는 없다. 18세기에 초안된 ‘민중’은 19세기에 완성되리라. 만인의 복지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되는 것은 필연이다.
막대한 추진력은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당연한 상태, 균형으로 이행한다. 사회철학은 본질적으로 평화의 학문이다. 모순 대립을 연구함으로써 분노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과로 해야 한다. 오늘날 사상가의 큰 의무는 문명을 진찰하는 것이다.
Ⅷ. 환희와 비애
1. 온전한 빛
에포닌은 플뤼메 거리의 집을 파악하고 도둑놈들이 접근 못하도록 조치했다. 그 후 마리우스에게 알려 둘을 재회시켰다. 마리우스는 저녁마다 거기에 왔다.
사랑에는 중간이 없다. 파멸 아니면 구원이다. 코제트가 만난 연애는 구원의 연애이기를 신은 원했다. 1832년 5월이 지속된 동안 거기에 있었다.
2. 완전한 행복의 삼매경
마리우스는 누옥의 사건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이야기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천국에 있었기에 현세를 잊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을 거의 대체한다.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이러한 사랑이 자신들을 어디로 이끌어 갈는지 서로 묻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도달한 사람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3. 그림자의 시작
장 발장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투생 할멈도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코제트의 비밀 연애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자정께 나가서 쿠르페락의 집으로 돌아갔다. 실제적인 쿠르페락은 마리우스의 그런 변화를 좋게 여기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마리우스는 코제트에게로 가다가 불쑥 나타난 에포닌을 만난다. 마리우스는 거북살스러웠다. 잠시 인사한 후 그녀는 가버렸다.
4. 곁말을 알아듣는 멍멍
6월 3일. 마리우스는 어김없이 코제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저만치에서 에포닌이 자기 쪽으로는 왔다. 이틀 달아서였다. 마리우스가 길을 바꿨는데 에포닌은 몰래 따라갔다. 그녀는 마리우스가 살그머니 정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어두운 구석에서 꼼짝 않고 생각에 잠겼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여섯 명의 사내가 플뤼메 거리로 들어섰다. 테나르디에, 클라크수, 괼메르, 바베, 몽파르나스, 브뤼종이었다. 그들 앞을 에포닌이 막아 나섰다. 테나르디에가 그녀를 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녀는 테나르디에에게 매달려 어떻게 나왔느냐, 엄마 소식을 알려 달라고 했다.
에포닌은 이 집에 아무것도 없다면서 계속 그들을 말렸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는다. 그러자 에포닌은 살문을 등지고 서서 원치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의 협박도 소용없었다.
여섯 강도는 잠시 물러나 상의 끝에 작업을 멈추기로 했다. 에포닌은 그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질 때까지 미행하며 지켜보았다.
5. 밤의 것들
어둠의 힘들은 서로 알고 있고 상호간에 신비로운 균형을 가지고 있다. 이빨과 발톱들은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무서워한다. 길을 막는 검은 형상 하나가 사나운 짐승을 멈춰 세우는 것이다.
6. 마리우스, 현실에 돌아와서 코제트에게 주소를 알리다
에포닌이 살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사이 코제트는 울면서 이 집을 곧 뜨게 될 것 같다고 마리우스에게 알렸다. 코제트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마리우스의 행복감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코제트는 이어 영국으로 갈 것 같다고 말했다. 마리우스는 포슐르방 씨의 행동이 부시리스(이집트의 전설적인 왕. 자기 나라에 들어오는 모든 이방인을 죽였는데, 헤라클레스에게 죽게 된다.)보다 더한 권력 남용이라 생각했다. 돌아올 기약도 없었다.
당신은 가시겠소? 라고 물었다. 코제트는 아버지를 따라갈 것이라 답한다. 마리우스는 쌀쌀하게 다른 데로 가겠다, 라고 말했는데 코제트는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네가 가버리면, 난 죽을 거야, 라고 말하며 마리우스는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고 모레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담벼락에 자기의 주소를 새겼다. 마리우스는 집으로 돌아오며 한 가지 결심을 했다.
7. 늙은이의 마음과 젊은이의 마음의 대면
질노르망 노인은 이제 아흔한 살을 훨씬 넘기고 있었다. 그도 이제 쇠약해지고 있었다. 그는 사 년이나 마리우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견기기 힘든 것은 다가오는 죽음이 아니라 마리우스를 못 보는 것이었다. 시인하지는 않았지만 질노르망 씨는 마리우스를 깊이 사랑했던 것이다. 마리우스의 이모가 꾸민 테오뒬로 후임자 교체 시도는 실패했다. 테오뒬을 볼수록 질노르망 씨의 마음에는 마리우스가 커져갔던 것이다.
6월, 갑자기 마리우스가 그런 질노르망 씨 앞에 나타났다. 모든 애정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여기는 뭐 하러 왔소? 라는 매정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마리우스는 결혼을 허가 받기 위해 왔다고 했다. 질노르망 씨는 딸을 불러 짤막하게 비아냥거리며 말하고 가라고 했다. 질노르망 씨는 손자의 이야기를 듣고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마리우스가 체념한 채로 나가려고 할 때 질노르망 씨가 그의 덜미를 잡고 자리에 앉혔다. 연애 이야기를 하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마리우스는 다시 한 번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늙은이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마리우스는 그간의 일과 자기의 열정을 말했다. 질노르망은 흐뭇해졌다. 질노르망 씨는 손자에게 진심으로 결혼을 하지 말고 그녀를 정부로 삼으라고 충고했다. 그 말에 마리우스는 충격을 받았다. 마리우스는 자기 아내를 모욕하지 말라고 정중히 말하며 어르신, 안녕히 계시라 말하고 떠나버렸다. 질노르망 영감은 대경실색했다. 아무리 불러도 마리우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Ⅸ. 그들은 어디로 가나
1. 장 발장
어느 날 장 발장은 가로수 길을 산책하다가 테나르디에를 보았다.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파리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기에 경찰이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날 아침에는 담벼락에 못으로 새긴 주소(마리우스가 코제트에게 주소를 알려주기 위해 썼던)까지 보았던 것이다. 장 발장은 극도로 불안했다. 그래서 영국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여권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그때 누군가 쪽지를 그에게 던지고 갔다. ‘이사하시오.’ 그 사람은 이내 사라져버렸다.
2. 마리우스
마리우스는 희망을 안고 외조부를 방문해서 절망만 안고 나왔다. 쿠르페락의 집에 와 날이 밝을 쯤에 잠이 들었다가 지난날 자베르에게 받았던 피스톨을 들고 거리로 다시 나왔다.
해가 지고 9시 정각, 약속한 대로 플뤼메 거리에 그는 있었다. 정원으로 들어갔으나 코제트가 보이지 않았다. 집안은 적막했다. 창을 두드리고 코제트를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리우스는 돌 벤치에 앉아 이제 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에포닌 같았다. 목소리는 당신 친구가 샹브르리 거리의 바리케이드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3. 마뵈프 씨
마뵈프 씨는 장 발장의 지갑을 습득물로 경찰에게 가져다 주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정직은 마뵈프 씨의 사정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추락했다. 늙은이의 참상은 아무도 동정하지 않는다. 마뵈프 씨는 아끼던 고서들을 하나씩 팔아야 했다.
플뤼타크 할멈의 발병까지 겹쳤다. 1832년 6월 4일, 그는 단 한 권밖에 없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투스를 팔 아래 끼고 밖으로 나갔다. 100프랑을 받아온 마뵈프 씨는 늙은 하녀의 머리맡 탁자에 5프랑짜리 돈을 포개 쌓아 놓고 아무 말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오후, 총성과 함성이 들려 거리의 사람에 물어봤더니 폭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마뵈프 씨는 거리로 나갔다.
Ⅹ. 1832년 6월 5일
1. 문제의 표면
폭동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리고 모든 것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휩쓸어 간다. 폭동은 어떤 기온 조건에서 느닷없이 형성되는 소용돌이 같은 것이다. 교활한 정략의 말처럼 정권의 입장에서 조금의 폭동은 군대를 시험하고, 중산계급을 결집시키며, 경찰의 힘줄을 늘여주고, 사회골격을 확인하는 계기로써 유용하다.
시가전 또한 야전과 같이 웅대하고 비장하다. 사상을 위해 스물에 죽는 자나, 가족을 위해 마흔에 죽는 자나 다 같이 의연한 사람들이다. 내전에서 항상 고통스러운 군대는 대담함에 신중함으로 대응했다. 폭동들은 민중의 과감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중류층에게 용기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피를 흘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살육은 경솔해진 자유에 대해서 강렬해진 질서의 승리를 너무 자주 더럽혔다. 요컨대, 폭동은 해로운 것이었다. 그 사이비 민중인 부르주아 계급이 그렇게도 쉽게 만족하고 있는 그 사이비 지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2. 문제의 근본
폭동이 있고 반란이 있는데, 두 개의 분노지만 하나는 부당하고 또 하나는 정당하다.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때로는 부분이 부당하게 빼앗는 일이 있는데, 그때는 전체가 일어나고, 그의 권리의 불가피한 요구는 무기를 드는 데까지 갈 수 있다. 전체의 주권에 속하는 모든 문제에서, 부분에 대한 전체의 전쟁은 반란이요, 전체에 대한 부분의 전쟁은 폭동이다. 튈르리 궁에 왕이 들어 있느냐 국민 의회가 들어 있느냐에 따라서 이 궁전을 공격하는 것은 정의거나 불의다. 파리가 바스티유 감옥에 반항한 것은 반란이다.
간혹 군중이 민중을 배반한다. 격정과 무지의 동요는 진보의 충격과는 다르다. 모든 난폭한 뒷걸음질은 폭동이다.
반란은 진리의 격노의 발작이다. 반란이 움직이는 포석들은 권리의 섬광을 던진다. 루이 16세에게 반항하는 당통, 그것은 반란이다. 당통에게 반항하는 에베르, 그것은 폭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란은 의무들 중에서도 가장 신성한 의무가 될 수 있으나, 폭동은 폭행들 중에서도 강장 파멸적인 폭행이 될 수 있다.
열의 강도에 따라 반란이 활화산이라면 폭동은 짚불이다. 가장 보통의 경우에 폭동은 물질적인 사실에서 나오는데, 반란은 언제나 정신적인 현상이다. 보통 반란은 혁명이라는 대양에 귀착한다. 하지만 반란도 때로 라인 강이 늪 속에 사라지듯이 갑자기 어떤 부르주아의 웅덩이 속으로 사라진다.
이른바 부르주아는 그 미묘한 차이를 잘 모른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폭동이요, 단순한 반역이요, 반항이다.
1832년 6월의 운동은 반란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생명이, 고동이, 전율이 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3. 장례식, 거듭나는 기회
앞서 말했듯 파리는 벌써 소요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불똥은 1832년 6월에 라마르크 장군의 죽음이었다. 그는 이름난 활동가였다. 그는 좌파와 극좌파 사이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민중의 사랑을 받았고, 황제에게 충성을 했기에 군중의 사랑의 받고 있었다. 라마르크는 ‘조국’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운명했다.
6월 5일 아침 생 탕투안 문밖에 장렬이 지나간다 하여 사람들이 운집했다. 그들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한편 정부는 손에 검을 쥐고 지켜보고 있었다.
아우스터리츠 다리 앞의 광장에서 영구차가 멈추고 라파예트가 조사와 고별사를 했다. 다시 행렬이 나아가는데 군대가 가로막았다. 군대는 라파예트의 삯마차가 지나도록 둔 뒤 군중들은 지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한 중대장이 죽고 시민도 한 명 죽었다. 그러자 1개 중대의 용기병들이 군도를 빼 들고 앞의 것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러자 소동이 폭발하고, 투석전이 일어나고, 총격전이 터졌다.
4. 옛날의 격동
소요는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곳곳에서 산발적인 총성이 들리고 상점은 철시하고 무기상점은 약탈당했다. 삼색기가 거리에 나타나고 공화국이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글씨들이 함께 따른다. 총알을 공공연하게 나눠주는 시민, 총알을 만드는 아낙. 그리고 한둘 눈에 띄는 시체. 선언서 낭독, 선동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가로등을 부수고, 수레를 받치고, 문을 뜯고, 포석, 잡석, 통들을 쌓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거리에서는 고립된 보초들과 시청으로 가는 국민병들의 무기를 시민들이 빼앗고 있었다. 한 시간도 채 안 되어서 중앙시장 일대에서만도 스물일곱 개의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어떤 잘 차려입은 시민은 거리에서 돈을 나눠주기도 했다.
이 폭동을 지휘했던 것은 일종의 격정이었다. 세 시간도 채 안 돼서, 반도들은 각처를 점령했다. 파리의 삼분의 일이 폭동 속에 있었다. 모든 지점에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어떤 연대들에서는 군인들의 태도가 불확실했다. 경찰과 시민들은 쌍방에서 순찰대를 운영했다. 정부는 군대를 수중에 둔 채 주저하고 있었다. 옛날 아우스터리츠의 싸움에 참가했던 당시의 육군 장관 술트 원수는 이런 상황을 침울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혁명의 바람은 다루기가 쉽지 않다.
교외의 국민병들은 질서 없이 허둥지둥 달려오고 있었고, 튈르리 궁전의 루이 필립은 아주 태연했다.
5. 파리의 특성
이태 간, 파리는 수많은 반란을 겪어, 모든 것에 빨리 예사로워진다. 하도 일이 많아서 사소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시가전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죽고 송장들이 포도에 가득 차는데 거기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는 당구 치는 소리가 들린다. 1831년에는 소총전 중 혼례식 행렬을 통과시키기 위해 싸움이 중단된 일도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파리의 위대함과 쾌활함이 필요하다. 볼테르와 나폴레옹의 도시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번 1832년 6월 5일의 싸움에는 이 위대한 도시가 왠지 제 힘에 겨운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파리는 겁을 먹었다. 시시각각 어둠이 짙어 감에 따라 파리는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는 폭동의 불길로 더 음산하게 물들어가는 것 같았다.
XI. 폭풍과 친해지는 미미한 존재
1. 가브로슈의 시(詩)의 기원
가로수 길에서 군중들이 후퇴할 때, 가브로슈는 어느 여자 고물상의 점두에 낡은 권총 두 자루를 낚아챘다. 총엔 격철이 없었다. 그는 노래를 부르며 전쟁에 나갔다. 유행가에 자기가 스스로 지어 마구 집어넣은 가사들을 섞어서 노래했다.
그런데 가브로슈는 자신이 돌본 두 꼬마가 친동생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아버지를 도운 것이다. 아이들은 거리에 내버려뒀다. 엄마, 아빠를 못 찾으면 다시 오라는 말을 남긴 채. 아이들은 십여 주가 흐르도록 어떻게 된 영문인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2. 행진 중인 가브로슈
노래를 부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며 반란군을 욕하는 아주머니들과 다투기도 하며 가브로슈는 쾌활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자신을 욕한 넝마주이 아주머니에게 그는 독백처럼 당신의 치룽 속에 먹을 만한 걸 더 많이 넣어주려고 이러는 것이라 중얼거렸다.(가브로슈는 혁명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는 격철 없는 권총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브로슈는 오름 생 제르베 쪽으로 갔다.
3. 이발사의 정당한 분개
두 꼬마를 쫓아낸 그 갸륵한 이발사는 제국 시대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 패용자인 늙은 병사의 수염을 깎고 있었다. 둘은 이야기 끝에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점두의 창유리 한 장이 깨졌다. 조약돌이 굴러 떨어졌다. 이발사가 깨어진 유리창으로 달려가 보니 가브로슈가 생 장 시장 쪽으로 부리나케 달아나고 있었다. 가브로슈로서는 두 꼬마둥이들 생각이 마음에 걸려 이발사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발사는 영문도 모른 채 이건 공연한 나쁜 짓이라며 저 부랑에게 자기가 뭘 어쨌냐고 아우성쳤다.
4. 소년이 노인에게 놀라다
그동안 가브로슈는 생 장 시장에서 앙졸라 등이 이끄는 일대와 합류했다. 이들은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다. 빨간 조끼를 입은 바오렐을 보고 행인들이 ‘빨갱이’라고 소리쳤다. 바오렐이 모퉁이 벽에서 파리 대주교가 계란을 먹어도 좋다고 허가하는 사순절 교서를 찢어버렸는데, 이를 보고 반한 가브로슈가 바오렐을 따르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행렬이 그들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매우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 하나가 그 대열 속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무기가 전혀 없었지만 전혀 뒤떨어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는 마뵈프 씨였다.
5. 늙은이
앙졸라와 그의 친구들은 용기병이 공격했을 때, 곡식 저장고 근처에 있었다. 그들이 바리케이드로, 라고 외치면서 가다가 한 노인을 만났던 것이다. 쿠르페락이 마뵈프 영감을 알아보았다. 쿠르페락이 영감에게 집으로 가라고 했지만 그는 그들을 따라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군중은 베르리 거리에 접어들었다. 가브로슈는 선두에서 목이 터지도록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생 메리 쪽으로 가고 있었다.
6. 새로운 가입자
집단은 시시각각으로 커져 갔다. 비에트 거리 근처에서 머리가 희끗한 키 큰 사나이 하나가 합류했는데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고 주의를 두지도 않았다. 마침 자신의 집 앞을 지나게 되자, 쿠르페락은 지갑과 모자를 가지러 갔다. 나오면서 마리우스를 보기 위해 자신을 기다리던 남장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그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생 드니 거리에 와 있었다.
XII. 코랭트 주점
1. 코랭트 주점의 역사
샤브르리 거리는 예전에 샹베르리라 불렀고 코랭트라는 유명한 술집이 있었다. 오늘날(1862년) 깊은 어둠 속에 빠져 버린 샹브르리 거리의 유명한 바리케이드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곳은 술집으로 장소가 좋아서 술집 주인들은 대를 이어 술집을 운영했다. 이 골목에 포 토 로즈라는 술집이 있었는데 풍류파의 대가인 나투아르라는 화가가 이 술집의 단골이었다. 그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장밋빛 말뚝에 코랭트(코린트)의 포도 한 송이를 그려주었다. 주인이 이것을 간판으로 바꾸어 술집이 코랭트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금은 포장도로 아래로 사라지고 없지만.
이 코랭트 주점도 회의소의 하나였다. 그랑테르가 이 술집을 발견해 애용했다. 이 술집의 주인, 위슐루 영감은 호인으로 외상도 잘 주었다. 1830년 경 위슐루 영감이 죽었다. 음식이 나빠졌지만 쿠르페락과 그의 친구들은 코랭트에 계속 갔다.
2. 폭풍 전야의 환락
졸리와 레글 드 모(보쉬에)는 6월 5일 아침, 식사를 위해 코랭트 주점에 갔다. 그들은 2층에 자리를 잡았다. 그랑테르가 뒤이어 들어왔다. 그들은 먹고 마셨는데 그랑테르가 주로 마시며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가 두 번째 연설을 시작하려는 때, 열 살도 채 못 된 어린애 한 명이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보쉬에를 찾았다. 그는 누군가의 심부름으로 ABC라는 말을 전했다. 나베라는 꼬마로 가브로슈와 친구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그들은 아이에게 음식을 나눠주려 했으나 아이는 행렬에 가야한다며 가버렸다.
그들은 아이를 보낸 자가 앙졸라라고 예상하면서도 가지 않겠다며 그 자리에 있기로 한다. 오후 2시경 식탁은 빈 병들로 덮여 있었다.
별안간 ‘무기를 들라!’는 고함소리가 거리에서 들려왔다. 앙졸라가 총을 손에 들고 지나가고 가브로슈, 푀이, 쿠르페락, 플루베르, 콩브페르, 바오렐이 눈에 띄었다. 그들 뒤를 무장한 군중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있던 보쉬에가 쿠르페락을 불렀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바리케이드를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보쉬에는 이리 와서 여기에 만들라고 외쳤다. 그러자 쿠르페락이 신호를 보냈고 군중은 샹브르리 거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3. 그랑테르가 혼수상태에 들어가다
과연 그곳은 기가 막히게 적합한 장소였다. 위슐루 아줌마는 한숨을 짓고 있었다. 군중들은 부지런히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술집의 직원들도 바리케이드 설치를 거들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마차도 징발해 바리케이드에 보탰다. 그랑테르가 종업원을 붙들고 주정을 부리자, 쿠르페락이 호통을 쳤다.
총을 쥐고 바리케이드 꼭대기에 서 있던 앙졸라는 그의 잘생기고 준엄한 얼굴을 들었다. 그가 그랑테르를 불렀다. 그는 ‘다른 데 가서 한숨 자고 술을 깨거라. 여기는 도취의 장소이지 주정의 장소가 아니야. 바리케이드를 모독하지 마라!’라고 그랑테르를 나무랐다. 그러자 그랑테르는 술이 번쩍 깼다. 그랑테르는 여기서 자게 해달라고 앙졸라를 졸랐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잠들어버렸다.
4. 위슐루 과부를 위로하다
쿠르페락이 위슐루 부인을 위로했다. 다 잘 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비는 갰다. 신참자들도 왔다. 앙졸라와 콩브페르, 쿠르페락이 모든 것을 지휘하고 있었다. 두 개의 바리케이드가 코랭트 주점에 기대어 직각을 이루도록 동시에 구축되고 있었다. 그곳에는 온갖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브로슈는 들뜨고 기뻐하면서 추진기 노릇을 했다. 그의 동기는 빈궁이고 그의 날개는 즐거움이었다. 당돌하고 활달한 그는 대열의 어디든 들쑤시고 다니며 고무하고 비판하고 웃겨댔던 것이다.
5. 준비
두 개의 바리케이드를 끝내고 기를 꽂은 뒤, 그들은 탁자 하나를 술집 밖으로 끌어냈다. 쿠르페락이 그 탁자 위로 올라갔다. 앙졸라가 탄약상자를 가져다주었고 쿠르페락이 탄약을 배분했다. 쇠붙이를 녹여 탄환을 만드는 작업도 계속되었다.
온 파리 시내에 울리는 국민병 소집의 북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으나 더 이상 주의를 끌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일제히 탄환을 쟀다. 앙졸라는 각 방면에 초병을 세웠다.
그리고 그들은 어두운 거리에서 과감하고 침착하게, 그 다가올 것을 기다렸다.
6. 기다리는 동안
기다리는 동안 사내들은 약포를 만들었고 여자들은 붕대를 만들었으며, 탄환을 만들고, 파수병들은 망을 보았다. 앙졸라 등의 지도자들은 술집의 한쪽 구석에서 사랑의 시를 말하기 시작했다. 장 플루베르의 시였다.
7. 비에트 거리에서 충원된 사나이
완전히 밤이 되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부가 여유를 갖고 병력을 집결하고 있다는 징후였다. 이 쉰 명의 사나이들은 6만 명의 사나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앙졸라가 가브로슈에게 갔을 때 그는 약포를 만들고 있었다. 비에트 거리에서 충원되었던 사나이의 얼굴을 본 순간 가브로슈는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그리고 명상에 잠긴 사내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그때 앙졸라가 가브로슈에게 바깥으로 살금살금 나가서 동정을 좀 살피고 오라고 지시했다. 가브로슈는 앙졸라에게 살짝 비에트 거리의 사나이가 밀정이라고 일러주었다.
가브로슈가 사람 몇을 부르는 사이 앙졸라가 그에게 갔다. 그는 자베르였다. 그는 수색당하고 기둥에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바리케이드가 함락되기 이 분 전에 총살될 거라고 앙졸라가 말하자 자베르가 당장 죽이라고 했다. 그러나 앙졸라는 우리는 심판자지, 살인자가 아니라고 맞받았다. 가브로슈는 정탐을 위해 가면서 자베르가 가지고 있던 소총은 자기 것이라고 선언했다.
8. 르 카뷕이라 자칭하는 사나이에 관한 여러 의문점들
모인 군중 중에는 줄곧 몸짓을 하고 큰 소리로 떠들어 대던 난폭한 주정뱅이 같은 사내가 하나 있었는데 르 카뷕이라 불렸다. 르 카뷕은 골목 칠층 집을 가리키며 저곳에서 진을 치면 좋겠다고 가더니 문을 마구 두드렸다. 문지기가 위에서 문을 열 수 없다고 하자, 총을 쏴 그 늙은 문지기를 죽여 버렸다. 그는 앙졸라에게 잡혔다. 일 분을 준 뒤 앙졸라는 그를 즉결처분해버렸다.
앙졸라는 혁명을 더럽히면 안 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한 뒤, 자신 또한 스스로 처형되는 것을 볼 거라고 말을 마쳤다. 나중의 일이지만 시체 공시소에서 찾은 르 카뷕의 몸에서는 경찰 신분증이 발견되었다. 경찰의 전설을 믿는다면 르 카뷕, 그는 클라크수였다.
모든 반도들이 신속하게 종결된 비극적 판결에 감동하고 있었다.
XIII.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마리우스
1. 플뤼메 거리에서 생 드니 구역으로
마리우스가 걸음을 옮김에 따라 불이 꺼진 구역이 나타나고 구경꾼들과 군인들이 보였다. 그는 이럭저럭해서 군중을 지나고 군대의 야영지를 지나고 순찰대를 피하고 보초들을 피했다. 그는 오직 적막과 어둠뿐인 곳에 이르렀다. 마리우스는 계속 나아갔다.
2. 올빼미가 내려다본 파리
이 때 하늘에서 파리를 내려다보았다면, 이런 음산한 광경이 보였을 것이다. 반도들이 요새와 각면보로 삼고 있는 파리의 중심이 마치 패인 거대한 검은 구멍처럼 보였을 테다.
포위된 지대는 일종의 거대한 동굴에 지나지 않았다. 잔인한 어둠. 거기에 침입하는 것은 무서웠고 머무는 것은 무시무시했다. 이제 끝장이었다. 거기에 기대할 빛이라고는 총화뿐이요, 거기에 기대할 만남은 돌연사의 출연뿐이었다.
이튿날에는 모든 것이 끝나고 한 쪽은 승리할 것이다. 그러면 반란은 마침내 혁명이 되거나 난동이 되리라.
묵직한 검은 하늘이 그 죽은 거리들 위에 있었는데 하나의 거대한 수의가 무덤 위에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3. 극단
마리우스는 시장에 도착했다. 불그레한 빛이 뚜렷이 보였는데 그곳은 코랭트 주점의 바리케이드 안에서 타고 있는 횃불이 반사된 것이었다. 그곳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만 더 내 디디면 그들 속에 갈 수 있는 곳에서 그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프랑스를 위해 한 생을 바친 아버지. 그런데 자신이 가려는 곳은 내란의 전쟁터였다.
그는 침통하게 울기 시작했다. 코제트가 없으므로 그는 꼭 죽어야 했다. 선언했고, 그녀는 주소를 알고도 그를 찾지 않았다.
갑자기 그는 고개를 들었다. 무덤이 가까워지면 그에 특유한 사상의 확장이 나타난다. 그의 사상이 갑자기 변모했다. 조국은 개탄할지 모르지만 인류는 찬사를 보낼 성스러운 사상의 문제다. 프랑스는 피 흘리지만 자유는 미소 지을 것이다. 게다가 인간끼리의 전쟁은 어느 것이나 다 동포끼리의 전쟁이 아니던가! 외란도 없고 내란도 없다. 불의의 전쟁과 정의의 전쟁밖에 없는 것이다. 군주정치, 압제, 신수권, 독재 모두 다 외적이다. 위대한 투사들이 궐기하여 국민들을 비추어 주고 절대적 존엄이 암흑으로 덮고 있는 이 처량한 인류를 흔들어 주어야 한다. 루이 필립이 폭군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의는 분할되지 않고, 진리에는 자기만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보는 없다. 양자는 어느 정도 권리의 찬탈을 나타내고 있고 보편적인 찬탈을 불식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싸워야 한다.
마리우스는 르 카뷕에게 사살당한 문지기를 보았다. 죽은 자가 죽을 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XIV. 웅장한 절망
1. 군기-제1막
생 메리 성당에서 2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가브로슈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가브로슈는 놈들이 오고 있다고 전했다. 가브로슈는 자베르의 총을 집었다. 파수꾼들도 돌아왔다. 그들은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묵직한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횃불의 반사로 희미하게 비춰진 총검과 총대들이 보였다. 그쪽에서 누구냐고 외쳤다. 앙졸라는 프랑스 혁명이라고 답했다. 군인들이 일제사격을 했다. 상대는 적어도 1개 연대는 되는 것 같았다. 재장전하는 사이 첫 사격에 부러진 깃발을 다시 세울 사람이 없는가, 앙졸라가 찾았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2. 군기-제2막
마뵈프 씨는 돌아가라는 권고도 듣지 않고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총소리를 듣고 앙졸라의 ‘아무도 안 나오나?’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앙졸라에게 곧바로 걸어갔다. 그는 말없이 앙졸라에게서 깃발을 빼앗아 바리케이드 위로 올라갔다. 반도들은 모자를 벗었다. 모두들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늙은이는 붉은 기를 흔들며 외쳤다.
“혁명 만세! 공화국 만세! 박애! 평등! 그리고 죽음!”
물러가라! 라는 소리가 들렸으나 마뵈프 씨는 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발포명령이 떨어졌다. 두 번째 일제사격이 바리케이드 위에 쏟아졌다. 가엾은 늙은이는 그렇게 죽었다.
인간 이상의 감동이 폭도들을 사로잡아 그들은 존경과 공포에 찬 마음으로 시체에 다가갔다. 앙졸라는 노인의 행위를 높이며 결의를 다지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그의 옷을 벗기고 그 피묻은 구멍들을 모두에게 보이면서 말한다.
“이제 이것이 우리의 깃발이오.”
3. 가브로슈에게는 앙졸라의 단총이 더 좋았을 것을
사람들이 경건함에 도취되어 마뵈프 영감의 시신을 술집 안으로 운구할 때, 경계를 서고 있던 가브로슈가 적들의 접근을 보았다. 그는 ‘경계하라!’라고 외쳤다. 사람들이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오려고 뛰쳐나왔다. 이미 바리케이드 위로 번쩍이는 총칼들이 넘실대는 게 보였다. 일 초만 더 있었다면 바리케이드는 점령당해 버렸으리라.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가브로슈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덩치 큰 경찰대원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으나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자베르는 총알을 재어놓지 않았던 것이다. 경찰대원의 총칼이 어린아이를 향해 쳐들렸을 때, 총알 하나가 날라 와서 경찰대원의 이마를 꿰뚫었다. 위기에 처했던 쿠르페락도 한 발의 총알이 구했는데 이는 바리케이드 안에 막 들어온 마리우스가 쏜 총알들이었다.
4. 화약통
마리우스의 갈등은 그 비통한 수수께끼인 마뵈프 씨의 죽음, 바오렐의 피살, 살려 달라 외치는 쿠르페락, 위협당하는 소년 앞에서 싹 사라졌던 것이다. 적들은 차마 바리케이드 안으로 뛰어들지는 못하고 사자 굴 속이라도 들여다보듯이 캄캄한 바리케이드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더 이상 총알이 없었기에 자베르에게 받은 피스톨을 던져버리고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떤 병사가 그에게 총을 쏘았는데 누군가 손으로 가로막았고 대신 쓰러졌다. 마리우스는 멀쩡했다. 마리우스는 어둠 속이라 상황을 잘 인지하지 못했다. 설핏 느꼈을 뿐이었다.
양측은 총부리를 서로 바짝 대고 겨누고 있었다. 장교 하나가 군도를 뽑아 들고 무기를 버리라고 위협했다. 앙졸라가 발포를 명령했다. 양쪽에서 동시에 총성이 터졌다. 모든 것이 연기 속에 사라졌다.
연기가 사라진 뒤, 쌍방이 전투원은 줄었으나,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탄환을 재고 있었다. 별안간 우뢰 같은 목소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떠나라! 안 그러면 바리케이드를 폭파하겠다!’ 마리우스였다. 그는 화약통 쪽으로 횃불의 불길을 기울이고 있었다. 적들은 퇴각해 버렸다. 바리케이드는 해방되었다.
5. 장 플루베르의 시(詩 )의 끝
모두가 마리우스를 둘러싸고 반겼다. 마리우스가 수령은 어디 있나고 묻자 앙졸라가 수령은 마리우스 너다, 라고 답했다. 그는 정신이 없는 상태라 자베르도 알아보지 못했다.
적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의학생인 몇 사람들이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점오를 했더니 한 명이 없다. 장 플루베르였다. 시체가 없으니 포로가 된 것이 분명했다. 포로교환을 하려고 하는데, 거리 저편에서 프랑스 만세, 미래 만세! 라는 플루베르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 총소리가 터졌다. 앙졸라는 자베르를 보며, 네 친구들이 이제 막 너를 총살했다고 말한다.
6. 생의 고통 뒤에 죽음의 고통
마리우스가 바리케이드 내를 순시하고 있을 때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릴 들었다. 바리케이드 아래서 기어오고 있는 그 목소리의 주인은 에포닌이었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손은 구멍이 나있었다. 그녀는 마리우스를 총알로부터 지켜주었던 손의 주인이었다. 총알은 손을 뚫고 등으로 나갔다. 그녀는 마리우스를 앉히고 자기의 이야기를 한다. 마리우스를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이 자기라고 했다. 가브로슈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에포닌은 그가 자기 동생이라 이야기해주었다. 주머니에 편지가 있으니 보라고, 전해주고 싶지 않은 편지였다고 했다. 에포닌은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이 죽으면 이마에 키스해 달라고 했다. 죽은 줄 알았던 에포닌이 눈을 천천히 뜨며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 뒤, 숨을 거두었다.
7. 거리의 측정에 능한 가브로슈
마리우스는 그녀의 창백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곁에서 편지를 읽을 수 없어 아래층 방의 촛불 옆으로 갔다. 코제트의 편지였다. 지금 있는 곳과 일주일 후에 런던에 가 있을 거라는 편지였다.
이제까지 다 에포닌이 꾸민 짓이었다. 불한당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과 코제트와 마리우스를 갈라놓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장 발장에게 이사하라, 라고 경고한 것은 에포닌이었다. 코제트의 편지는 그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에포닌에게 코제트가 5프랑을 주고 심부름을 시킨 것이었다. 바리케이드로 간다는 쿠르페락의 말을 듣고는 플뤼메 거리에 반드시 있을 마리우스에게 친구들의 이름으로 그를 불러냈다. 그녀는 그이를 아무도 못 갖는다, 라고 질투하는 사람들의 비통한 기쁨을 느끼면서 죽었던 것이다.
코제트의 편지를 받은 마리우스는 이제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영국으로 가고 할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한다. 변한 것이 없다. 그러자 그는 두 가지 의무가 떠올랐다. 코제트에게 자기의 죽음을 알리고 가브로슈를 구해야겠다는 것.
마리우스는 자기는 죽을 것이고 영혼은 함께 할 것이라는 편지를 썼다. 코제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두 번째 편지는 간직할 것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기 시체를 질노르망 씨에게 보내달라는 내용의 쪽지였다. 그리고 가브로슈를 불렀다. 코제트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에게 맡기며 내일 아침에 전해주라고 했다. 가브로슈는 의아해 했지만, 마리우스는 가브로슈가 돌아오기 전에는 함락되지 않을 거라 안심시켰다. 가브로슈는 편지를 가지고 가며 늦지 않게 돌아와 있으리라 생각했다.
XV. 옴므 아르메 거리
1. 수다스런 압지
6월 5일의 전날, 장 발장은 코제트와 투생을 데리고 옴므 아르메 거리에 자리 잡았다. 코제트가 저항했다. 장 발장은 추적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코제트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짐은 간소했다. 코제트도 그녀의 문방구와 압지밖에 가져가지 않았다.
장 발장은 다소 안도했다. 다음날 투생이 장 발장에게 난리가 났다고 알렸다. 그러나 여러 생각이 복잡한 장 발장은 그 이야기를 흘렸다. 그는 외려 코제트가 걱정이었다. 그녀는 이곳을 옮긴 후 방에 박혀 있었다. 장 발장은 코제트와의 행복한 나날이 계속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압지에 자국으로 남은 그녀의 편지를 보고 말았다.
그것은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절망했다. 장 발장은 여태 겪었던 어떤 고통보다도 지금의 상실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장 발장의 코제트에 대한 사랑은 부성애였지만 그는 다른 사랑을 하고 느낀 적이 없었음으로 그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머리털 뿌리 속까지 한없이 이기심이 깨어남을 느꼈고, 자아가 심연에서 아우성쳤던 것이다.
장 발장은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뤽상부르 공원의 배회자. 투생이 들어왔다. 싸우고 있는 쪽이 어딘지 물었다. 밤중, 그는 거리에 나와 앉아 있었다.
2. 등불 빛이 미워하는 어린애
장 발장은 집 앞 푯돌 위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두 차례 총성을 들었다. 가브로슈가 옴므 아르메 거리에 막 도착했다. 거리를 헤매는 소년에게 장 발장이 무슨 일인지 물었다. 7번지를 찾는다는 말에 짚이는 바가 있어 편지를 달라고 했다. 가브로슈는 답장은 바리케이드라 보낼 수 없을 거라며 돌아서 가버렸다.
3. 코제트와 투생이 자고 있는 동안에
편지를 펼쳐든 장 발장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마음속에 기쁨을 느끼고 무시무시한 환성을 질렀다. 그는 그 싸움에서 살아날 길이 없을 것이다.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장 발장은 침울해졌다. 그는 국민병 복장을 입고 무장을 한 뒤 시장 쪽으로 나갔다.
4. 가브로슈의 과도한 열성
가브로슈는 가로등을 깨어가며 노래를 부르면서 복귀 중이었다. 그는 문득 손수레 안에서 자고 있는 시골뜨기를 발견한다. 주정뱅이임이 분명했다. 가브로슈는 수레를 바리케이드에 보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브로슈는 수레만 살짝 빼내고 쪽지에 수레 징발 영수증을 쓴 뒤 자기 서명까지 첨부해 시골뜨기 조끼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수레는 시끄러운 소리를 냈는데 이것은 위험한 짓이었다. 이미 가로등 깨는 소리와 노랫소리에 위병소의 국민병들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터였다. 그는 위병소 중사에게 길을 제지당했다. 어딜 가는지 묻는 중사의 말에 가브로슈는 변죽만 울렸다. 중사가 가브로슈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수레를 밀어 그를 쓰러뜨렸다. 그 바람에 총은 공중을 향해 발사되었고 병사들이 우르르 나왔다. 가브로슈는 달아나다 길을 잃어버렸다. 그는 이 거리 저 거리로 헤매면서도 나지막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수레 주인이 되레 포로가 되고 훗날 종범 혐의로 심문을 받는다. 가브로슈 사건은 두고두고 탕플 구역의 전설이 되어 회자되었다.
레 미제라블 5부 장 발장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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