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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1943~ )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 고교 재학 중 단편 ‘입석 부근’으로 등단함. 이후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를 따라 전국의 공사판을 떠돎. 오징어잡이배, 빵공장 등에서 일하며 떠돌다가 승려가 되기 위해 입산, 행자생활도 함.
굳이 글머리에 이 유명한 작가에 대해 새삼스럽게 소개한 이유인즉, 이 소설이 황석영 자신의 성장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유준’이 겪는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의 성장통이 이 소설의 주된 고갱이입니다. 해서, 이 소설과 접점을 이루는 작가의 발자취를 잠시 먼저 언급하게 된 것이죠.
소설의 서사는 주인공 유준과 그의 주변인물인 인호, 영길, 상진, 정수, 선이, 미아 등이 각 장의 일인칭화자가 되어 이끌어갑니다. 이런 방식의 전개는 친근하면서 몰입도가 높아 수월하게 읽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객관적인 상황을 파악해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화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며, 연속되는 사건의 자연스러운 연결로 이런 단점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간결하고 힘 있는 황석영 특유의 문체가 더해져 장점이 더욱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쓴 소설입니다.
아무리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지만 작중 화자를 작가와 완전히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전적 소설을 쓰면서 작가 스스로가 완전한 객관화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일인칭화자의 서술을 선택하되 각 인물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서술하게 함으로써 이런 한계를 벗어나 나름의 자기 객관화를 잃지 않는 영리한 전술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유준은 베트남파병이 결정되고 동기 행정병의 배려로 특휴 아닌 특휴를 받게 됩니다. 이박삼일.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친구들에게 연락해 '미아'의 소식을 물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명문중학이라면 요즘엔 이해가 잘 안 되는 체계지만, 1950~60년대 당시엔 중학교, 고등학교도 입시를 치러 진학했으므로 비평준화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유준은 공부를 곧잘 해서 명문중학교를 나오고 명문고교에까지 진학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큰 사건이 주인공의 나름 모범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물론 그 전부터 약간의 방황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4.19였습니다. 길거리에 자신의 옆에 있던 친구 '중길'이 경찰이 쏜 총에 희생당했던 것입니다.
친한 친구, 인호가 먼저 사고를 치고 퇴학을 당합니다. 유준도 정형화된 틀로 인간의 의식을 억압하는 학교에 환멸을 느끼며 자퇴를 결심합니다.
<성장기에 얼마나 잘 순응하는가에 따라서 직업의 적성이 결정되고 어느 등급의 학교를 어느 때까지 다녔는가에 따라 사회적 힘이 결정되겠지요. 이러한 위계질서가 권력과 재산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중략)... 저는 결국 제도와 학교가 공모한 틀에서 빠져나갈 것이며, 세상에 나가서도 옆으로 비켜서서 저의 방식으로 삶을 표현해 나갈 것입니다. (하략)>
이런 글로써 유준은 자퇴사유서를 학교에 전달하고 학교를 그만둡니다.
먼저 사회생활 중이던 인호와 함께 가출해 산에 기거하며 지냅니다. 그러다 문득 당시 유행하던 무전여행을 떠납니다. 낭만적인 여행이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꿈도 꾸기 어려운 무임승차라든가, 여러 사람들의 사심 없는 호의, 배려, 보살핌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입니다. 물질적인 재부로 따지자면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한했던 시절임이 분명한데 어떻게 우리보다 훨씬 더 후덕한 저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싶었답니다. 이것이 고도의 자본주의가 낳은 파편화, 개인화, 경쟁제도를 활용한 억압, 주인공이 그다지도 못마땅해 했던 제도들이 안착하면서 마련된 인간성 파괴, 공동체적사고해체의 비극이 아닐 런지.
어쨌든 이렇게 이 둘은 남원에 들러 영길과 함께 제주도에 갔다가 부산으로 가 상진을 만나기도 하면서 한 달여 여정을 마칩니다. 이 여행을 마치고 유준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예감합니다. 인호는 고향으로 가버리고 유준은 어머니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야간공고에 가게 됩니다. 이곳에서 유준은 명문고교와는 유다른 생동감을 느낍니다. 이 시절, 미아라는 동갑내기 여성과 연애도 아닌 듯한 연애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 사회에 대한 환멸을 떨칠 수 없었던 탓일까요? 유준은 미아와의 인연을 느슨하게 놓아버립니다.
대학에 진학해 다니다가 한일회담반대시위 중, 연행되어 이십여 일, 유치장 신세를 지다가 마난 장씨, 속칭 ‘대위’라는 유랑노동자와 이 년여 전국을 떠돌게 됩니다. 유준은 노동의 현장에서 삶의 생동감을 배웁니다. 노동계급의식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 것일까요? 어쨌든 이런 작가의 인식은 대위를 통해
<생각해 봐라. 제 힘으루 일해서 먹구 살겠다는 놈들인데 아주 나쁜 놈들이 있겠냐구. 나쁜 놈들이야 저 서울 번듯한 빌딩들 속에 다 있지.>
라는 말로 드러납니다. 이 둘은 함께 오징어잡이 배, 신탄진 공사판 등을 떠돌아다닙니다. 이 신탄진 강가에서 대위는 유준에게 개밥바리기별에 대해 이야기해주죠.
<잘 나갈 때는 샛별, 저렇게 우리처럼 쏠리고 몰릴 때면 개밥바리기.>
그와의 긴 동행을 끝낸 유준은 진주로 가 빵집점원으로 일합니다. 그것도 잠시, 부산 범어사로 출가를 위해 떠납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부산시내에서 지인을 만났고 며칠 뒤, 어머니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유준은 집에서 미리 사 모았던 약을 털어 넣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이마저 실패하고 닷새째 만에 깨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현재, 미아와의 만남은 펑펑 내린 눈 때문인지, 미아의 외면 때문인지 엇갈리고 맙니다. 홀로 서울을 떠나기 위해 기차를 탑니다. 베트남으로 떠나는 여정의 출발이었습니다. 유준은 자신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출발점에 섰음을 깨달았지만, 아무런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여정은 기차로 시작해 기차로 끝납니다. 기차는 정시에 떠나고 오며, 정해진 궤도를 따라 도는 정형성을 가지고 있죠. 이런 정형성은 기성화 혹은 사회화된 어른의 이미지와 유사합니다. 소위 철이 든다고 하는 것은 사회가 정해준 궤도 위, 철로를 순항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특별휴가를 나온 그 삼일이라는 시간의 간극사이에서 주인공, 유준은 추억으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유준의 삶은 상처투성입니다. 집안의 몰락, 가난, 친구의 죽음, 사회의 급격한 변화 등등. 자유를 향한 갈망과 억압. 그 속에 이전투구하며 유준은 작은 승리를 쌓아나갑니다. 작은 승리에는 언제나 큰 패배가 숨어 있는 법이지요. 시대적으로는 4.19로 이승만을 몰아냈지만, 친구가 죽습니다. 이듬해 일어난 군사쿠데타는 그마저 무너뜨리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렸고, 그렇게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지금까지도 일본의 사과와 제대로 된 배상도 받지 못하게 만든 한일회담을 시작합니다. 당연한 듯이 첫사랑을 떠나보내야 했고, 세속을 떠나려던 일이며, 죽음으로의 도피까지 모두 실패했는데, 언제나 죽음이 도사리는 전쟁터라는 곳으로 제도와 권력에 떠밀려 향하게 되는 이 패배, 그리고 아이러니.
삶의 여정은 어쩌면 철길처럼 정해져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크게 삶과 죽음부터 작게는 사회적 틀, 가족관계 등. 그러나 그 속에서 자신이 정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소위 개아리 한 번 안 튼 삶은 그 철길 위에서 이야기할 거리도 없는 싱거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 모르죠. 여럿이 함께 작심하면 하다못해 노선을 바꿀지도. 혹은 영화 ‘설국열차’의 기차처럼 궤도를 아예 파괴해 버리는 선택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실 현실은 너무나 완고하죠. 작가의 말 중에, 자본의 벽은 봉건시대 영주들의 성벽보다 높고 거대하다, 라고 표현했듯이.
어떤 선택이든지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라는 작자의 말은 그런 이유로, 모든 청년세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숱한 유준, 인호들에게 자신이 정한 가치를 끝까지 놓치지 말고 소신껏 살아가라는 일갈, 응원으로 들리기도 하는 반면, 아무리 그래도 벗어날 수 없는 궤도 위니까, 자신에 찬 꼰대가 내지르는 섬뜩한 비아냥거림으로도 들렸습니다.
책을 덮은 지금, 잠시 이 궤도에서 이탈하고 싶어지는 뒤늦은 충동이 일어 엉덩이가 덜썩입니다, 완행 기차의 덜커덩거리는 기차간에 앉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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