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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

철도원 삼대 줄거리 - 황석영

트레바리 2021. 4. 9. 01:16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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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도원 삼대 표지

    소설은 이진오가 굴뚝위에서 농성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요즘 흔한 회사매각과 이에 따른 고용승계보장, 해고자 복직 등을 걸고 긴 싸움이 시작되면서 소설도 시작하는 것이죠.

    이 소설은 황석영 작가가 방북했을 당시 이북에서 만난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구상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구러 삼십여 년을 구상하고 묵혀놓았던 이야기였죠. 작가는 이진오가 있는 높은 굴뚝을 삶과 죽음의 경계 정도로 설정합니다. 해고와 복직의 경계를 두고 삶과 죽음의 경계로 설정한 것은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명제에 작가가 동의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여하튼 이진오는 사백십일을 이곳에서 농성하며 마치 접신한 듯, 꿈을 꾸듯, 증조부, 조부, 아버지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한편의 민담처럼, 전설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주저리주저리 풀어나갑니다.

    이진오의 집안은 영등포에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원래 강화도가 고향이지만 개항,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그곳에 흘러들어 자리를 잡은 것이었습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진오의 할아버지 이일철과 이이철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이일철의 아버지 이백만은 일제의 철도공작창에서 선반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철도원으로 키우고 싶어 일철, 이철로 이름을 짓습니다.

    철도원 삼대 이진오 집안 가계도

    그 희망에 맞게 맏이 일철은 철도원양성소에 들어가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기관수까지 되어 증기기관차를 운행합니다만, 동생 이철은 사회주의자가 되어 항일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됩니다. 이이철과 경성트로이카, 경성콤 등의 일제시기 사회주의계열 노동운동의 서사가 한바탕 펼쳐집니다. 기가 막힌 것은 소위 해방직후입니다. 미군정이 모든 노동운동과 자주적인 건국준비를 일제보다 더 심각하게 탄압했던 것입니다. 이철이 해방도 보지 못하고 옥사하고, 철도원이었던 형, 이일철은 동생의 유지를 받아 해방직후 전평(전국노동자평의회)에 참가해 맹렬한 노동운동을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미군정과 앞잡이들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고 아들 지산(이진오의 아버지)은 얼마 후 아버지를 따라 월북합니다. 전쟁이 터지고 지산은 인민군 보급열차를 끌다가 폭격에 다리를 잃고 포로가 됩니다. 포로 분류심사에서 잔류를 결정하면서 반공포로가 되어 서울 영등포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아내, 윤복례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이진오를 낳게 되었던 것이죠.

    고공농성 사백 일이 넘어가자 사측과 노조가 타협을 하게 되어 이진오는 굴뚝에서 내려옵니다. 이진오는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체포되지만 여론 등에 힘입어 한 달 만에 석방됩니다. 복직해 지방의 공장으로 내려갔더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진오의 동료 둘이 다시 고공농성을 다짐하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재를 톺아보는 서사입니다. 상당한 고증을 거쳐 일제시기 노동운동의-거의가 사회주의 계열입니다- 역사를 비교적 상세히 전달합니다. 분파를 일소하고 통일적인 조직을 재건해 앞선 선배들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 치열하게 노력했던 활동가들의 삶을, 이이철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들을 통해 면밀히 보여줍니다. 다수의 실존 인물, 활동가들이 등장하는 부분도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이념적 편견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이기 때문에 어떤 선입견이 개입할 필요도 여지도 없습니다. 이이철과 그 동지들의 지하활동을 읽고 필자는 대하소설 서너 권은 읽은 듯한 착각에 빠졌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만큼 박진감이 넘쳤고 현실감이 있었던 탓입니다.

    노동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결국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탄압의 역사, 이 나라의 재부를 쥐락펴락하는 자본이 탄생한 배경의 속살 또한 보여주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일제와 결탁했던 친일주구, 매판자본이 다시금 미군정 하에서 화려하게 부활하는 장면은 언제 보아도 속이 매스꺼워지는 장면입니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자 비극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 그래서 삼대, 사대 째에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진오의 회상에 등장하는 영숙이란 노동운동 동지. 그녀는 한진중공업 해고자, 김진숙 지도위원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인물입니다. 그녀는 얼마 전, 항암치료를 받는 와중에 남쪽 끝에서 청와대까지 도보행진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전광판 위로, 굴뚝 위로, 크레인 위로 올랐고 또 뛰어내렸습니까? 하루에 여섯 이상이 산재로 죽어갑니다. 비정규직은 달랑 문자 하나에 해고당해야 합니다. 살려달라고, 살자고 쟁의를 일으키면 공권력은 사용자의 편에 서서 노동자를 탄압하고 법은 손배소 따위를 날려 수억 원의 벌금을 때립니다.

    영숙을 회상하며 던진 진오의 말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실제로 했던 말입니다.

    "전태일과 주익이 형 유서가 같은 한국사회라 그랬잖우...."

    김주익 열사는 실제 한진중공업에서 김진숙 씨와 함께 일했던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였습니다. 아래 링크는 김주익 열사의 약력을 간단히 보여주는 곳입니다.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www.kdemo.or.kr/patriot/name/%E3%84%B1/page/9/post/664

    이어 영숙의 어머니가 했던 말은 콧등을 시리게 합니다.

    "같이 좀 살자, 못된 것들아. 같이 좀 살아."

    소설의 맺음은 이런 현실을 현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일은 자꾸 되풀이된다는데. 그건 뭐 세상이나 사람이 달라 지구 풍속두 달라졌는데두 그렇다는구나. 아마 사람 사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겉만 달라졌지 내용은 같다는 얘기겠지.”

    이진오의 할머니 신금이가 한 말입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말입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저항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왜 더 미워하는 것일까, 라는 영숙의 물음에 진오가 답하는 말도 새겨볼 만합니다.

    “우리가 그 사람들 가까이 있으니까 그럴 테고, 누나가 싸울 힘이 남아 있는 게 샘이 나서 그러지 않을까?”

    글쎄요. 그런 점도 있겠지만, 패배가 일상화된, 패배가 내면화된 상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항하던 사람은 거개 막대한 인신, 금전적 손실을 입어온 세월이 철도원 삼대, 100년의 세월입니다. 연좌제까지 있어, 집안에 걸출한 ‘빨갱이’ 하나 나오면 공직은 물론 번듯한 직장은 꿈에도 못 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걸출한 ‘빨갱이’는 대부분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만들어졌었죠.

    수많은 노동자가 있을 터인데 작가는 왜 하필 철도노동자를 선택했을까요? 당시 상당한 규모이기도 했지만, 미군정과 분단이 가로막은 철길이 상징하는 의미를, 정확하게는 그 철길의 단절이 상징하는 의미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발전이 평가와 계승에 있다고 볼 때, 현재의 우리 노동계급의 비극은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비극의 연장입니다. 거세당한 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운동. 그 단절. 소위 빨갱이로 몰려 죽임 당한 것도 모자라 역사에서마저 지워져버린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의 삶을 온전히 복원하는 일은 남북의 철길이 뚫리고 두 역사(歷史)를 한 역사(驛舍)에서 풀어낼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렇게 일그러지고 끊긴 레일들을 바로잡고 이어야만 역사의 철마가 막힘없이 전진할 수 있을 테지요. 그러면 그 수많은 이진오가 굴뚝위에 오르지 않아도 될 겁니다. 해방은 8월 16일 단 하루였다는 말은 뼈를 때리는 ‘팩폭’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작가의 주제의식이랄까요, 아니면 희망사항이라고 할까요? 작가가 신금이의 입을 빌어 이진오나 우리에게 나직이 속삭이는 듯한 말 하나, 옮기는 것을 끝으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일제시대에는 그랬다 치고, 왜 우리 식구들은 힘센 쪽에 붙지 못하고 맨날 지는 쪽에만 편들었어요?”

    “왜, 약한 쪽 편드는 게 싫으냐?”

    “물론이지요. 너무 손해잖아요?”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 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철도원 삼대 뒤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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