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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

아큐정전

트레바리 2019. 10. 22. 01:02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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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큐정전-루쉰

    루쉰(19881~1936)은 중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삶을 살다 간 중국의 대표적 소설가다. 러일전쟁이 조선반도에서 한창이던 1900년대 초, 일본에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건너갔다가 중국의 근대화, 인민의 정신개조를 위해서는 문화운동, 곧 문학을 해야한다는 깨달음에, 의학공부를 포기하고 문학의 길을 걷게 된다. 

    루쉰이 살던 시대는 청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1911)이 일어난 시기였고, 일본군국주의와 열강들의 팽창주의가 동아시아를 점점 전쟁의 구렁텅이로 빠뜨려 가던 극심한 혼돈의 시기였다. 이른바 새로운 국제적 질서가 세워지는 시기였다. 아시아의 봉건국가들도 이 시기, 근대화의 과정을 뼈 아프게 겪게 된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숱한 선구자들의 자기 각성과 구상이 격류처럼 부딪치고 또는 뒤섞이는 시기이기도 하다. 루쉰은 붓을 무기로 이런 혼돈의 전장 한가운데로 과감히 뛰어들었던 것이다.

    루쉰의 작품은 총 32편이다. 대부분이 짧은 단편소설인데 이 글에서 소개할 아큐정전만 중편 분량 정도가 된다. 아큐정전은 루쉰을 세계에 알린 거작이자, 대표작이며, 해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고전이다. 루쉰의 작품을 시작하면서 아큐정전을 먼저 뽑은 데는 물론 이런 이유도 있었지만, 루쉰이라는 작가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이 작가의 문제의식이 어디서 출발했는가를 이 아큐정전이라는 작품이 가장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아큐정전을 읽으면 중국의 배우 주성치가 자꾸 떠오른다. 희화된 주인공의 조금은 모자란 생각과 과장된 행동들이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유발하면서 독자를 계속 웃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웃기기만 하는 인물은 아니다. 아큐는 루쉰과 같이 중국의 격변기를 살고 있었으며 현재적 문제에 계속 부딪치는 인물이다. 아큐는 마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성석제의 조동관처럼, 분명히 우스꽝스러운 인물이지만, 또한 세태를 고발하는 장치로써 결코 우습게만 볼 인물이 아니다.

    아큐는 사실 당시의 중국을 상징하는 장치로 보면 될 듯하다. 무능하지만 대국의 허세는 버리지 못하는 새로운 지배층과 망상에 빠진 몽상적 혁명가들과 여전히 봉건적 질서에 찌든 농촌과 찢어지게 가난한, 세상이 뒤집어졌다는 데도 여전히 최하층에서 압박 받던 민초들을 뭉뚱그려놓으면 ‘아Q’가 될 듯도 싶다. 

    숱한 경향들과 그 경향속에 탄생한 조직들이 어떤 방향이든 근대 중국을 이끌어가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없고 혼란만 가중된다. 끝까지 어리석게 굴던 아큐는 신해혁명으로 뒤바뀐 세상에서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 죽음마저 명예스럽지 못했다고 말하며 소설을 맺는다. 이것은 중국의 당시 상황에 대한 작가의 비판과 미래에 대한 염려로 보였다.

    [총살은 목을 자르는 것만큼 볼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얼마나 시시한 사형수인가. 그토록 오랫동안 조리돌렸는 데도 창 한 마디 못 하고. 그들은 공연히 헛걸음만 쳤다고 생각했다.]
    -루쉰 ‘아큐정전' 중.

    날품팔이꾼, 최하층민 아큐가 새 세상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는 결론은 사뭇 충격적이다. 이것은 신해혁명으로 지배자의 얼굴만 바뀌었지 실제 민중의 운명이 바뀐 것이 아니란 것을 암시한다. 신해혁명은 지배자의 혁명이었을 뿐, 민중의 혁명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루쉰은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며 중국이 다시 위대해지길 바랐다. 인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계급과 착취가 없는 위대한 나라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렇다. 루쉰은 당시 열병처럼 번졌던 맑스주의자였다. 

    많은 사람들, 특히 대한민국 사람들은 사회주의 계열의 문화적 치적이나 독립운동 등을 평가하는데 무지하고 인색하다. 반공주의와 국가보안법, 분단 등의 영향이 컸겠다. 하지만 중국의 문인들이나 정치가들을 입에 올릴 때마저도 자기 검렬에 빠져, 억지로 비판이 아닌 비난을 섞어넣는 모습은 학자적 양심을 운운 하기 전에 그냥 슬픔이 밀려오게 만든다. 왜 중국문학을 읽고 있는데 분단의 슬픔을, 한계를 다시금 곱씹어야 하는지……. 

    이 책의 역자 또한 루쉰의 작품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면서 정치적 노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후반기 작품을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폄훼한다. 후반기의 변화가 정치권력을 향한 선택이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루쉰은 소설을 쓰기 전부터 맑스주의자였다. 역자가 과연 몰랐을까?

    작품의 경향은 격변하는 정세에 따라, 혹은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게 쓰여진 것이라 봄이 타당하다. (루쉰은 Revolution 이란 뜻이다.) 루쉰은 대중의 의식을 사회주의혁명에 알맞게 이끌어가는 선전매체로써, 사회주의혁명의 무기로써 문학을 선택한 사회주의혁명가였던 것이지, 소설을 위해서나 정치지형의 변화에 따라, 철새처럼 권력을 따라 사회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다. 낡은 반공의 잣대로 루쉰을 바라봐서는 절대 그의 진면모를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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