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문학/소설

고향-루쉰

트레바리 2019. 10. 25. 18:49


728x90
반응형

루쉰의 작품은 이번 고향이란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만하려 한다. 그동안 아큐정전, 광인일기, 풍파를 잇따라 분석해 보았는데 짧은 소견으로 대가의 위엄에 누를 끼친 것은 아닌 지, 적잖이 우려된다. 해서 당분간 루쉰의 작품은 손 떼기로 한다. 사실 루쉰의 작품 몇 가지를 분석하면서 필자 스스로도 골치가 꽤 아팠다. 루쉰은 중국현대사의 격변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격변기라는 것은 사회 문화, 제도적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강의 아랫물에 사는 물고기가 심산 협곡의 격류를 제대로 알 리가 없다. 한 가지 다짐할 것이 있다면 훗날 중국근현대사를 공부할 기회가 있어, 앞서 썼던 글이나 오늘 쓰는 이 글에 첨삭할 것이 생긴다면 꼭 그렇게 하겠노라는 것이다. 사설이 꽤 길었다. 이제 오늘 살펴볼 고향이라는 작품을 본격적으로 들여다 보자. 

고향이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쓸쓸함이다. 거기엔 몇 가지 단절이 기여한다. 우선 20년 간 찾지 못했던 단절이다. 이는 고향의 과거와의 단절이다. 과거와 다른 고향에서 느끼는 쓸쓸함이야 어디에 비하랴. 더해 그런 고향마저 떠나야 하는 작중 주인공과 고향의 다가올 단절이다. 20년 만에 찾은 고향도 가산을 정리해 고양을 아주 뜨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고향을 떠야 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는다. 격변기 중국사회에서 이러저러한 이유,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어떤 이유에서 건 간에 고향을 떠나는 일은 비일비재하였으리라. 

도착한 고향집은 많이 낡아있고 이사준비로 스산하다. 어머니와 조카가 맞이하는데, 어머니가 옛 벗인 윤토의 이야기를 전한다. 한번 보고싶다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윤토를 떠올리며 달밤 수박밭에서 챠와 맞서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 장면은 주요한 장면이다. 기억해 두시길 바란다. 여하튼 윤토는 30년 전, 10여세 때 만난 집안 일을 보던 사람의 아들이다. 완전히 종속된 하인은 아니었으나, 하인과 비슷했다고 보면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윤토의 아비가 너무 바빠 윤토에게 주인공 집안의 일을 한동안 보게 하는데, 이때 또래였던 둘이 가까워진 것이다.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주인공과는 달리 윤토는 바깥 세상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새도 잡을 줄 알고 바닷가에서 조개도 잡는다. 밤에는 아버지와 수박밭에 나가 파수도 선다. 다양한 경험이나 놀이를 아는 것 같지만 기실  어린 윤토는 이미 생업을 위해 노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하고 신분이 낮았던 윤토가 주인공을 만난 것도 아비의 ‘일’, 즉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오면서다.

여기서 잠시 앞서 기억해 두시길 바랐던 실존하지 않는 ‘챠’라는 동물에 대해 짚고 가자. 챠가 상징하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챠는 실존하는 짐승이 아니라 루쉰이 소설속에서 허구로 만들어낸 짐승이다. 개만한 것이 달밤에 수박을 갉아먹는데, 털이 마치 기름칠 한 듯 매끄러워 잡으려하면 가랑이사이로 쏙 빠져나가 달아나기 일쑤라는 짐승이다. 

달은 광인일기에서 식인을 깨닫게 하는 광명을 뜻하는 장치였다. 여기 고향에서 달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변은 환한데 수박밭을 쏠아먹는 짐승. 잡히지도 않고 다만 쇠갈퀴로 죽여야 한다. 이것은 착취가 만연한 사회, 지배구조를 비유한 것이 아닐까? 온갖 세금과 할거하던 군벌들. 신해혁명으로 봉건왕조가 무너지는 개벽천지가 되었는 데도 소위 민중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미끄러워 잡을 수 없다는 상징은 권력 같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 피 흘려 혁명을 완수했으나 권력은 다시 소수의 새로운 지배계층에게 넘어간 것. 

그러면 챠를 어떻게 잡아야 하느냐 묻는 주인공에게 윤토는 쇠갈퀴가 있잖아, 라고 답한다. 죽이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이야기다. 일체의 권위와 계급을 타파하지 않으면 민중의 삶은 바뀔 게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수선하게 이사준비를 하던 차, 윤토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타난다. 이제 윤토는 주인공에게 너나들이를 하지 않는다. 세상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신분의 벽. 그것은 반상의 구분이었을까, 빈부의 차이였을까? 어쨌든 여전히 가난한 윤토였다. 윤토의 아들과 주인공의 조카가 어울려 논다. 윤토는 말한다.

“말이 아닙니다. 여섯째 놈도 거들게는 되었지만, 그래도 먹기에는 모자랍니다. 게다가 세상도 어수선하고……. 어디를 가나 돈만 뜯기고, 법도 없고……. 농사도 시원치 않고. 농사 지어서 메고 나가 팔아도, 세금을 내야 하니 본전까지 손해 보고. 그렇다고 팔지 않으면 썩어 버리니…….”

윤토의 이 말은 윤토 같은 기층 민중의 삶을 대변하는 말이다. 

이사를 준비하는 주인공의 집엔 마을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가구나 가재도구를 얻어갈 요량으로. 가난한 중국을 상징하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윤토 또한 마지막날 다시 와 몇 가지 약속했던 물건들을 얻어간다. 향로와 촛대 등이었다. 주인공은 그런 윤토를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아직도 우상을 숭배한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득 자신도 조카와 윤토의 아이가 자기와 윤토와 같은 상실과 아픔을 겪지 않길 희망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희망 또한 실체가 없는 우상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자괴감을 느낀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본디, 어디에 있거나 없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치, 이 땅 위에는 본래 없던 길을, 나그네가 밟고 지나가다 보면, 거기에 길이 트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루쉰의 고향 중에서 마지막 문장 인용-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현실의 불안함에 기인한다. 당시 중국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큰 변화, 진통을 겪고 있었다. 중국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여전히 봉건적 인습과 착취가 만연한 사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들의 희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작가의 말 대로 본디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고자 하고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은 이 말을 하고팠던 것이다. 같이 희망을 가지고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자. 문학을 통해 사회변혁에 복무하고자 했던 루쉰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인 김남주의 입을 빌리자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정도가 되지 않을까?

 

반응형

'문학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읽기 1편  (0) 2019.10.28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펼치며  (1) 2019.10.27
풍파-루쉰  (0) 2019.10.24
광인일기-루쉰  (0) 2019.10.24
아큐정전  (0) 2019.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