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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

풍파-루쉰

트레바리 2019. 10. 24. 23:50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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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큐정전과 광인일기가 전형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중국사회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낸 무거운 작품이라면 풍파는 앞의 두 작품에 비해서는 일반적인 인물이 등장하면서 갈등 또한 나름 가볍게 마무름 되어 한결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풍파는 당시 중국인들의 어리석음을 가벼운 사건 하나로 짚으면서 여전히 폐습에 찌든 사람들의 군상을 고발한다.

    풍파는 1920년 작품이다.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여덟 해가 지난 시점에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저 한적하고 목가적으로 보이는 강변마을이 이 소설의 유일한 무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몸무게에 따라 이름을 짓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노파는 구근이다. 태어날 때, 아홉 근이 나갔던 모양이다. 손자는 칠근, 증손녀는 육근, 이런 식이다.

    구근은 계속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진다고 투덜댄다. 그저 옛날이 좋았다고 주절대는 일흔아홉의 노파다. ‘정말이지, 갈수록 어려워지기만 하니…….’ 라는 말을 달고 산다. 다만 이 노인의 상징은 구시대의 망령 같은 것이다. 어려워지기만 한다, 라는 말에 근거라고는 대를 거듭할수록 태어나는 아이들의 몸무게가 가벼워졌다는 것 하나 뿐이다.

    게다가 육근이는, 증조할머니보다 서 근이나 덜 나갔고, 육근이는 아범 칠근이보다 한 근이 덜 나갔으니, 이건 흔들릴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풍파 중에서-

     이것의 상징은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들어선 지 8년 째인 아직도 중국사회가 봉건적 악습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게 아닌가 한다. 마지막까지 건강하나 정신은 별로 없어보이는 구근이 상징하는 것은 구습, 봉건적 의식이라 보면 될 듯하다. 칠근의 아내가 저울이 잘못된 거라 따져도 ‘무게감'이 있는 ‘구근'은 요지부동 듣지 않는다. 완고한 인습, 현대적 의식의 부재를 꼬집는 것이다.

    강변마을에서 대대로 노를 저어온 칠근의 가족이었다. 배를 저어 성안을 오가는 칠근은 동네 소식통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택시기사 같은 분이랄까? 아무튼 이런 칠근이 저녁 어스름에 나타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날은 칠근이 엄청난 소문을 물어왔다, 황제가 등극했다는 어마어마한 소문을.

    때는 중화민국 수립 8년 째 되는 1920년. 공화정이 다시 왕정이 되었다는 소식은 마을 유지나 변화를 불편해 하는 구근에겐 반가운 일이겠으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사람에겐 황망하고 위험한 일일 수 있다. 변발을 자른 칠근은 그 후자였다. 칠근의 처와 칠근은 절망하게 된다.

    소문은 칠근이만 들었던 것이 아닌가 보다. 요즘으로 치자면 상투를 틀고 다니는 유림입네 하는 동네 꼬장꼬장한 식자, 조칠야가 그 소문에 거들먹거리며 나타난다. 조칠야 같은 동네 지식인이 도사처럼 치렁이던 머리를 다시 깔끔하게 변발한 것을 보고 칠근의 아내는 황제가 다시 등극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칠근의 집에 나타난 조칠야는 변발을 섣불리 자른 칠근을 문제삼는다. 이에 무섬증을 느낀 칠근의 처가 칠근의 불찰을 탓하며 타박하기 시작한다. 조칠야의 등장과 칠근 내외의 싸움으로 동네 사람들이 모여든다. 실랑이는 계속되고 그 와중에 밥을 더 달라던 육근이 사발이 떨어져 깨진다. 칠근이 딸을 ‘개 같은 년!’이라 욕하고 이런 장면들을 웃으며 구경하는 조칠야. 

    조칠야 같은 사람은 왕정복고를 꿈꾸거나 획책하는 보수, 수구 세력을 상징할 테다. 칠근의 역성을 들던 한 아낙을 끝까지 따라가 괴롭히는 조칠야는 그것이 외부적인 외압이든, 내제된 자기 검렬이든, 새로운 세상에 저항하는 검질긴 봉건잔재를 상징한다고 보면 무리가 없으리라. 

    여기서 육근이 떨어뜨린 사발은 중요한 상징이다. 왜냐면 이튿날 성안으로 들어간 칠근이 사발을 고쳐서 온다. 비싸게 고쳤다고 투덜대면서. 물론 가난한 서민에게 당시, 사발은 중요한 재산이었다. 하지만 짧은 단편에서, 그것도 상징으로 점철된 루쉰의 소설에서 사발과 사발의 깨짐, 사발의 수리라는 일련의 과정이 허투루 나왔을 리야. 

    짐작해서 서술해 보건대, 사발은 먹을 것을 담는 그릇이다. 육근의 깨진 밥그릇은 이런 되잖은 논쟁으로 미래세대의 밥그릇이나 깨고 있는 세태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사발이 깨졌다고 딸에게 상스런 욕을 하는 칠근의 모습은 사람의 머릿속이 바뀌지 않으면 머리 모양을 바꾼들 무슨 소용인가, 하는 말을 작가가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십여 일이 더 흐른다. 황제의 군대는 오지 않았다. 칠근의 처는 용상에 황제가 제대로 있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딸, 육근의 머리는 변발로 변해 있었고 새로 전족을 한 채 뒤뚱거리며 수선한 사발을 들고 뛰고 있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난다.

    다시 사발은 봉건적 악습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함을 알 수 있다. 수선한 사발은 칠근의 의식이 다시 봉건적 사고로 기울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해혁명으로 깨졌던 봉건적 사고가 황제등극이란 헛소문에 다시금 부활한 것이다. 그것을 변발한 딸이 전족을 한 상태로 그 '귀한' 사발을 들고 뒤뚱이며 뛰는 모습으로 그려놓은 것이다. 

    노예의식에 찌든 사람은 노예제가 폐지되어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많다. 전통이라든지, 풍습이란 이름으로 검질게 남아있는 가부장적인 가족관계가 대표적이다. 호주제는 없어졌지만 아빠의 성을 대부분 따른다. 며느리는 시댁 제사에 가야한다. 

    루쉰은 개벽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봉건적 잔재에 얽매여 살고 있는 중국인들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혁명은 의식혁명이 가장 중요한 것이란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혁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의식의 개조고 그런 사회적 의식은 사회문화에서 파생되는 바, 루쉰은 사회문화적인 일대 변혁을 위해 펜을 들었던 것일 테다. 루쉰의 위대함은 여기서 발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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