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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두산 천지, 한라산 백록담

    반도의 남과 북의 끝에 위치한 천지와 백록담은 꼭 닮아있습니다. 그 사이의 산들은 높을수록 하늘에 가까운 전설을 품었고 들에 가까운 낮은 산일수록 인간에 가까운 전설을 품었습니다.

    11월 말. 추풍령을 기점으로 북쪽은 정규군의 싸움, 남쪽은 빨치산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전남도당은 시월 말경 조직정비를 거의 마칩니다. 동부 백운산지구, 서부 불갑지구, 남부 유치지구, 북부 노령지구, 중부 조계산지구, 북동부 백아산지구로 나뉘었습니다. 이천오백이 넘게 48년 10월에 입산해 50년 7월 말, 생환한 이백여 명의 구빨치산이 하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염상진은 백아산 쪽 무등골에 임시로 자리 잡은 도당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직재편에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총사령부의 명을 어길 수 없었던 젊은 군관이 도당위원장 박영발에게 끝까지 항명하다 웃으며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로서는 책임을 다한 것이고 당 우선의 원칙까지 지켜진 것이었습니다.

    염상진은 전남도당 총사령부 부사령관이, 안창민은 조계산지구 정치위원이 되었고, 이해룡은 유치지구 연대장, 하대치는 조계산지구 기동대장, 오판돌은 군당위원장의 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도당의 파악에 따르면 경남, 전북도 전남도당과 비슷한 규모(이만 명)가 입산했다고 했습니다. 입산자 수에 비에 무장정도는 형편없었습니다.

    이학송 등의 해방일보 일행은 만주로 건너가 이곳저곳에 배속 받아가며 기자 일을 해나갔습니다. 전라도 말씨를 알아듣고 이학송에게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정하섭이었습니다.

     

    2. 아시아인은 미국인과 동등하지 않다 아시아인은 인간이 아니며, 이간 이하의 존재다

    소령으로 진급한 심재모는 신병을 구타해 죽인 유 소위의 문제로 국군보다 인민군이 낫다는 식의 말을 참모회의에서 했다가 헌병대에 끌려가 수난을 당합니다. 결국 묻어두겠다는 언약을 하고서야 풀려납니다. 유 소위의 아버지는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김범우는 중공군 장교가 잡혔다는 영국군 진영으로 가 동료들이 장교를 고문하는 것을 괴롭게 바라봅니다. 거기서 만난 영국사병 쥬리안 토스들이라는 사람이 미국이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 아시아인은 사람이 아닌 것이라 말합니다. 살아서 돌아가면 이 이야기를 꼭 책으로 쓸 것이라는 말과 함께.

    송성일, 최인석은 서울에서 만납니다. 징병을 피해 11월 20일 개강에 맞춰 서울에 온 것입니다. 최인석은 위기에 빠진 송경희를 버린 주제에 그녀의 동생을 통해 다시 만나고 싶어 합니다. 최인석은 최서학이 부럽다고 합니다. 최서학은 전 원장이 진단서를 거부하자, 순천의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고 병역면제를 받았던 탓입니다. 여하튼 최인석은 송성일에게 너희 누나는 자기와 잔 사이라고 밝힙니다. 송성일은 최인석이 더 없이 혐오스러웠습니다.

     

    3. 탈출

    김범우는 동료들이 잠든 틈을 타 탈출합니다. 인민군이 가깝다는 말을 들었고 후퇴하는 어지러운 시기였기에 쉽게 탈출합니다만 겨울이 녹록치 않은 장애였습니다. 이틀간을 북행하다가 인민군을 만나 연행됩니다.

    12월 4일 국군이 평양에서 철수합니다. 권 서장은 머리가 아팠습니다. 지난번에 비해 열 배나 많아진 입산자들은 벌써 대여섯 개의 작지 않은 마을을 해방구로 차고앉았습니다만 군대가 없이는 토벌이란 어림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야 토벌도 가능한 셈이었던 것입니다. 권 서장은 읍내에서 튀밥 튀기는 장사를 시작한 이근술을 찾아갑니다. 복귀를 종용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이근술은 일정 때 죄 닦음도 하지 않은 경찰들이 위에서 시킨다고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죄를 저질렀다고 조목조목 이야기하며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권 서장은 이근술에게 다시 범죄에 가담시키려 했다는 죄의식을 느낍니다.

     

    4. 죽음의 대열, 해골의 대열

    안창민은 정치, 사상학습을, 하대치는 군사기본학습을 맡아 입산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기 위한 기본적인 정신무장, 행동요령, 생존법들이었습니다.

    염상구는 솥공장, 정미소 등의 재산을 노리고 죽은 윤태주의 여동생 윤옥자에게 접근합니다. 염상구는 준군사조직인 청년방위대 대장이 되어 더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권 서장은 염상구에게 국민방위군법이 통과되었고 이에 따라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자들을 뽑아 경상도의 교육소로 보내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청년방위대는 국민방위군으로 바뀌었단 말과 함께. 말이 뽑는 것이지 사실 강제징병이었음은 물론입니다.

    최인석도 서울에서 강제징집 되어 남으로 행군하는 대열에 끼어있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끌려와 행군만 하던 이들이 차츰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5. 1951년 1월 4일

    이학송과 이원조 둘 만 박헌영이 있는 서울로 향합니다. 인민군신문도 중요했지만 해방일보도 중요했습니다. 남겨진 김미선은 이학송에게서 남자를, 죽은 남편을 봅니다.

    12월 24일 서울에도 대피령이 내립니다. 민기홍은 기자들에게 마련되는 열차를 타러 가족과 함께 갑니다. 역은 북새통입니다. 그 와중에 국민방위군차출이 또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행군 중, 최인석은 그만 사망하고 맙니다. 자기 소대에서 열네 번째 희생자였습니다. 최인석보다 사흘 뒤 붙들린 송성일도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앞의 부대들이 휩쓸고 지나간 탓에 보급사정은 더욱 좋지 않았습니다. 송성일은 이런 나라에 진절머리가 났고 이대로 가다간 죽을 것이 뻔해 옥천에서 탈출합니다. 이즈음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국민방위군을 편성한 정부에 전국적인 비난 여론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비참한 몰골의 국민방위군 대열을 ‘죽음의 대열’ 이니 ‘해골의 대열’ 이라 불렀습니다.

    1951년 1월 3일,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깁니다. 6일, 이학송은 서울에 와 집으로 갑니다만 아무도 없습니다. 이웃이 전하길 아내가 잡혀가고 아이들이 엄마를 찾겠다고 나선 뒤 돌아오지 않았다 합니다. 김범우가 인민군의 통역이 되어 이학송 앞에 나타납니다.

    전남도당의 명령에 따라 총출동해 하산을 준비하던 염상진은 조원제를 다시 만납니다. 조원제는 정보 분트에서 일하고 있었고 김일성대학으로 진학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6. 거창, 그 오지의 낮과 밤

    논산으로 거처를 옮긴 법일의 식구들은 철수하는 미군에게 또 해코지를 한 차례 당합니다. 큰딸을 빼돌렸다가 법일이 구타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가족은 다시 짐을 싸고 피난을 떠납니다.

    거창군 신원면은 아직 국군이 수복하지 못한 지역이었습니다. 지리산 산청 오부면이 목표인 연대는 따로 양효석이 속한 3대대에 신원면을 수복하고 산청으로 진격하라 명령합니다. 처음 진입하자 이미 빨치산들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군대는 산청으로 진군합니다. 남겨진 경찰과 청년방위대는 민가에 막대한 폐를 끼치면서 횡포를 부립니다. 이튿날 밤, 면사무소가 기습당하고 경찰이 십여 명 죽습니다. 연대장은 삼대대장에게 호통을 칩니다. 삼대대장은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고 다시 신원면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육백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릅니다.(지리산일대 공비소탕을 위해 주둔했던 국군11사단 9연대 연대장 오익경 대령과 제3대대 대대장 한동석 소령의 작전에 의해 감행된 민간인 학살 범죄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을 소설 속에 담은 부분입니다.)

     

    7. 빨치산,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의 진정성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아이를 찾을 수 없었던 가운데 이학송은 다시 해방일보 무리를 따라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김미선은 아이들과 어머니를 버리고 갈 수 없어 북행하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1월 26일 재차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연일 서울이고 인천이고 쑥대밭을 만들며 공습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방위군 교육대 중 한 곳을 맡은 심재모 소령은 교육대원들이 단체로 항의하는 사태를 맞이해 겨우 진정시킵니다. 환경은 열악해 난민수용소 같았습니다. 이들의 항의는 당연했습니다. 국회에서 통과한 예산은 오십만 명 기준 209억이 고작이었는데 이도 지난 일, 이월의 허위영수증을 내라고 종용한 바, 중간 착복을 위한 것이었죠. 더 가관은 과잉징집된 오십만 명 정도는 수용할 시설이 없어 그냥 버려진 것이었습니다. 방위군 부사령관 윤익헌 대령의 회유까지 거절한 심재모는 예편되길 바랐지만 그에게 날라 온 것은 전투가 치열한 동부전선으로 가라는 ‘전출명령서’였습니다. 이때 이미 이 문제는 하나의 큰 사건이 되어 부산의 피난정부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안 그러면 더 이상한 것이었죠.

    손승호는 솥뚜껑과 함께 산생활과 작전을 수행하면서 솥뚜껑의 진정성, 혁명에의 무한한 신념과 복무에 감동합니다. 손승호가 총사의 명령으로 연예대에 배치되면서 솥뚜껑과는 이별하게 됩니다. 만년필을 솥뚜껑에게 쥐어주고 총사에 가자 그를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두병이었습니다.

     

    8. 천점바구와 외서댁

    소화와 들몰댁은 복내면 후방부대에서 보급품 조달과 옷 짓기를 했습니다. 소화의 임신으로 들몰댁이 출산바라지 차 함께 와 있었던 것입니다. 외서댁은 화선투쟁을 하겠다고 바득바득 우겨 군사훈련을 받고 떠났습니다. 보급품을 조달하기 위해 장을 보고 오던 들몰댁이 뒤를 밟혀 주인집 내외, 들몰댁, 소화가 연행됩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망자, 행방불명자 칠팔만, 재기불능자 이십여만, 중환자 사십여만 명을 낸 데다 거창 양민학살사건까지 터지자 이승만 정권에 대한 여론은 나빠질 대로 나빠졌습니다.

    양효석은 상관의 지시에 따라 거짓진술을 하달 받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대위로 진급하면서 사단 내 전출지를 마음대로 고르라고 해 그는 주저 없이 고향을 골랐습니다. 양효석이 토벌군사령관으로 환향하게 된 것입니다. 된재댁은 신이 났지만, 염상구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양효석은 오자마자 좌익척결위원회를 해산시켜버립니다.

    오판돌은 소화 일행이 연행된 것이 방위대 때문인 것을 알고 보성경찰서를 치려고 했지만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새 부대가 오고 석거리재를 차고앉은 분대를 치기로 합니다. 천점바구의 철갑소대가 지원을 나갑니다. 이 소대에는 외서댁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른 뒤 유동수가 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전선이 다시 후퇴하면서 신념을 잃고 탈주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9. 다시 삼팔선 전선

    심재모는 대대장으로 최전방에 있었습니다. 전쟁의 양상은 본격적인 땅따먹기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삼십 리 전진을 위해 수십, 수백의 젊은이들이 양쪽에서 죽어갔습니다. 고지 점령 명령이 떨어져 돌격한 그의 부대원들은 120명의 사망자를 내고 점령에 성공합니다. 이는 심재모는 몰랐지만 3월 24일 맥아더가 내린 38선 이북의 진격명령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염상구는 보성경찰서장, 남인태를 만나 소화와 들몰댁을 벌교로 빼내려고 했지만 남인태가 듣지를 않습니다. 방위군 소속이 잡은 사람들인 데다가 소화에 대해선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그랬던 것입니다. 염상구는 양효석이 석거리재 기습에서 자수한 유동수를 소화다리에서 처형한 일로 인심을 잃고 있음을 역에서 느낍니다. 염상구는 양효석을 찾아가 여차저차 하니 소화와 들몰댁을 이용해 민심을 되돌리자 제안하고 양효석은 이 미끼를 덥석 뭅니다. 소화와 들몰댁은 순천재판소로 넘겨지고 양효석은 다시 돌아온 민심에 흡족해 염상구에게 술을 삽니다.

     

    10. 세상을 떠난 김사용

    부산, 국회의원 안창배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을 물고 늘어지다가 특무대에 끌려와 고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특무대 대원들은 자신들이 바다에 수장시킨 빨갱이가 육칠천은 될 거라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특무대 대원 둘은 안창배에게 이덕우 변호사와의 관계를 캐묻습니다. 안창배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자신이 포기하면 저런 반인륜적인 범죄를 밝히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시간 최익승은 대한국민당 국회의원 한 명과 낮술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요새 말로 공천을 따내려는 수작이었죠.

    안창배는 고문을 끝내 이겨내고 나흘만에 풀려납니다. 대신 더 이상 위 사건과 수사과정을 거론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서였습니다. 그러나 1951년 3월 29일 거창의 국회의원 신중목이 국회회의장으로 뛰어 들어와 거창사건을 폭로합니다.

    염상구는 편지 한 장을 들고 윤옥자를 겁박하고 있었습니다. 빨갱이와 내통한 증거라는 그 편지는 염상구의 부하가 통학열차에서 윤옥자의 가방에 몰래 넣은 것이었죠. 염상구는 윤옥자에게 결혼약속을 받고 그 자리에서 첫 일을 치릅니다. 그 일은 삽시간에 소문이 났습니다.

    양효석은 송경희를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차에 송성일 이 거지꼴로 나타나자 징집영장을 보냅니다. 송성일이 징집되기도 전에 부대이동 명령이 떨어지자 양효석은 권 서장에게 송성일의 징집을 꼭 시행하라 당부합니다.

    김사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염상진은 도당사령부로 갑니다. 김범준은 남해여단에 최후통첩을 하러 가고 없었습니다. 남해여단은 인민군 사백여 명을 이끌고 다니면서 유격전은 하지 않은 채, 요구만 많이 하고 있었던 탓입니다. 돌아온 김범준은 염상진 일행과 김사용의 상여가 지나갈 선산 앞으로 갑니다. 멀리서 아버지의 운구행렬을 보며 김범준은 24년 일본을 탈출해 상해로 갔던 일, 그곳에서 군관학교에 가고 헌병이 되었던 일, 그리고 홍군을 따라 나섰던 대장정. 그리고 무정 장군과 압록강을 넘었던 일을 떠올리며 눈물짓습니다. 그 구비 구비마다에 아버지 김사용의 믿음과 지지가 있었습니다. 염상진도 김사용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11. 재귀열이란 돌림병

    하대치의 기동연대는 조계산지구 최강의 부대였습니다. 소대장으로 강동기, 천점바구 등이 있었고 부대원으로는 김복동, 마삼수 등 전체적으로 벌교 입산자들 중심의 연대였습니다. 오늘 하대치의 부대는 조계산지구의 고립을 막기 위해 쌍암면지서를 습격하기로 되어있습니다. 쌍암면지서를 점령하고 보루를 폭파합니다만 돌아오는 길에 김복동이 혼절합니다. 몸이 불덩이였습니다. 여러 대원들에게 같은 증상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김복동은 죽고 맙니다. 그의 몸에서 이들이 기어 나옵니다.

    이 병은 전북, 전남 등에서 동시에 나타납니다. 미군이 이를 통해 옮는 재귀열병으로 생물학전을 펼친 것입니다. 재귀열병은 열이 올랐다가 내렸다가 다시 오르면서 사람을 서서히 죽게 합니다. 4월이 지나면서 전남도당의 병력 3할을 재귀열병으로 잃습니다.

     

    12. 싸울 수밖에 없는 싸움

    소화와 들몰댁은 염상구가 뒤를 봐준 덕에 징역 오 년을 언도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이송되면서 수국을 보다가 문득 소화는 정하섭이 높은 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 동등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심재모는 춘천 군병원에 입원합니다. 팔에 박힌 파편을 빼낸 것입니다. 거기서 구타사건으로 신병을 죽였던 유 소위를 만납니다. 유 소위는 소위 나이롱환자로 의가사제대할 거라고 뒷말이 나옵니다. 있는 놈들은 뒤에서 국민방위군 비리로 해먹고 군수품 빼돌리고 없는 놈들만 전방에서 죽어나간다는 말들이 나옵니다.

    반공일(휴일)에 길남은 학급미화를 위해 뽑혀 나왔다가 선생님이 사주는 과자를 먹습니다. 반만 먹고 동생을 생각하며 몰래 반은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얼마나 될까 화장실에서 확인하는데 빨갱이 무찌르자며 여학생을 괴롭히는 소리가 화장실 뒤에서 들립니다. 나가자 덕순이가 남자 아이들 셋에게 당하고 있었습니다. 길남이 싸웠지만 셋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과자는 이미 다 부서졌지만 후회스럽지는 않은 길남이었습니다.

    태백산맥 4부 전쟁과 분단(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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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맥 4부 전쟁과 분단(9권)

    13. 위대한 전사 조원제 천점바구는 당원 입당심사에 제출할 자서전을 쓰고 있었습니다. 퇴고를 도와주는 김혜자는 천점바구를 짝사랑하는 순천여중 출신 입산자였습니다. 문화부중대장, 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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