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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피아골

    피아골은 임진왜란으로부터 여순사건에 이르기까지 반란군, 의병들의 최후의 보루였고 비장한 최후를 마친 곳이었습니다. 그 전에 이미 화전민, 농민들이 쌓아올린 다랑이 논 또한 피맺힌 노동의 증거였습니다. 피아골의 아름다운 단풍이 핏빛으로 보이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해룡은 비무장들의 지리산행을 지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연대장에서 부사령관으로 직급이 바뀌었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습니다. 하대치는 비무장 대원들 호위로 부대를 이끌고 이해룡과 동행중이었습니다. 지리산의 가을은 아름다웠지만 마음들은 불안으로 무거웠습니다. 하대치는 호위 임무가 끝나면 달궁에서 열리는 시월혁명 기념 씨름대회에 참가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하대치는 씨름대회에 참가해 이현상을 바라봅니다. 이현상을 만나는 것은 하대치의 소원 중 하나였죠. 하대치는 결승에서 젊은 빨치산에게 지고 맙니다. 흥겹게 오락회가 이어졌습니다.

     

    26. 새로운 전술

    각 지구의 빨치산이 정예화되면서 작전 목표는 후방교란이 되었습니다. 당장의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고 전선에 집중된 병력을 분산하기 위한 전술이었습니다. 염상진은 구월 초순에 지리산에서 이현상의 주재로 열린 육개도당회의의 하나마나한 결정들이 못내 아쉬웠고 이현상에 대해 실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이 부분은 작가가 이현상의 지리산 행적에 대한 비판하는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강대진은 갓 열일곱의 소년전사로 염상진의 연락병이었습니다. 다녀온 보고를 마치자마자 백아산으로 다시 보냅니다.

    이태식은 스무 명의 돌격조를 이끌고 곡성 쪽 철길을 파괴합니다. 폭파나 이런 것이 아니라 레일을 하나 빼내는 정도의 작업입니다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하대치도 벌교 쪽에서 같은 작업을 합니다. 철도는 대규모 병력과 보급품을 나르는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것입니다.

    해방구가 없어 결국 보급 투쟁에 나서야 하는 이해룡은 구례군당 위원장에게 인민들의 인심이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다가 김범준이 타이르는 말을 듣고 깊이 수긍하게 됩니다. 인민의 생존조건이 변한 상황에서 그들을 탓할 수 없고,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 자신들의 책임이 더 크다는 김범준의 말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죠. 이해룡은 보투를 크게 조직합니다. 무장인원 백을 포함 삼백오십여 명을 이끌고 부자들 위주로 털어갑니다. 일곱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해룡은 결국 일곱 동지의 몸을 뜯어먹는 셈이라 생각합니다.

     

    27. 고향에서 몰려나기 시작하는 사람들

    양효석은 전투에서 허리를 다쳐 병원에 후송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적군의 여성에게 허리를 찔렸는데 그것을 두고 여러 말이 오갑니다. 여성들의 평균수명, 끈기 등등. 그러는 와중에 대위에서 소령으로 특진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염상구는 청년단원들을 다그치고 있었습니다. 회정리 삼구 쪽에 빨치산들이 부잣집을 털어갔던 것입니다. 너무 감쪽같이 털어가 날이 밝아서야 동네 사람들도 알았습니다만, 염상구는 일단 입산자 가족부터 족치라고 명령합니다.

    한장수 노인은 머슴방에 있다가 빨치산들이 곳간을 털어내는 것을 목격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김복동, 마삼수, 강동기의 안부를 묻습니다. 누군가에게 김복동이 몇 달 전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합니다.

    시월 한 달간 빨치산의 후방교란작전의 여파로 11월 전북에 비상경계령이 내립니다. 남인태는 굳이 권병제를 보성으로 불러 훈계 아닌 훈계를 합니다. 그 무렵, 회정리 삼구에서 죽은 유 서방의 아내 샘골댁이 친정으로 떠나고 있었습니다. 남양댁, 목골댁이 이삿짐 싸는 것을 거들어주러 왔습니다. 샘골댁을 배웅하며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28. 지리산 동계대공세

    손승호와 박난희는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손을 맞잡습니다. 전북도당은 지리산을 벗어나 이동하기로 되었던 탓입니다. 유격투쟁의 기본은 분산이었습니다. 손승호의 짐작으로 삼사천 명의 빨치산이 지리산에 모여 있었습니다. 11월 중순이 넘은 지리산은 이미 겨울이었습니다. 전북도당은 밤에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이해룡이 보투에 집중하고 있을 때 도당에서 지리산을 뜨라는 지령이 내려옵니다. 정찰조를 보낸 결과 이미 군인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였습니다. 김범준은 여기서 효과적으로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합니다.

    10월 25일 휴전회담 장소를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겼고 그 한 달 뒤, 11월 27일에는 삼십일간의 잠정적 군사경계선 획정을 합의 했습니다. 이 소강상태를 이용, 11월 25일 남원에 백선엽의 야전군사령부가 설치되었고 수도사단, 팔사단이 지리산 일대로 이동했습니다. 전남, 전북, 경남의 세 도에 각각 전투 사단 하나씩 배치된 것이었고 그들의 공격목표는 지리산이었습니다. 12월 1일,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각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다음날 서남지구 공비토벌작전이 개시됩니다.

    군인들은 경찰들과 사뭇 다른 양상으로 작전을 전개합니다. 능선을 타고 앉아 감시하고 공격했습니다. 밤이면 불을 피웠습니다. 능선마다의 모닥불 수를 보면 아연하지 않을 빨치산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해룡은 무장대 5명에 비무장 서른으로 나누어 분산시켰습니다. 불을 피울 수 없는 겨울밤, 총을 쏠 수 없는 표적. 쫓기고 쫓기다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적들이 사라졌습니다. 근거지로 돌아오자 반 이상이 희생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릎이 꺾였지만 이해룡은 다시 결의를 다지며 보투를 나갑니다.

     

    29. 각 도당 동계대공세

    12월 19일, 전남도당도 백운산, 백아산 지구가 포위된 채로 토벌공세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리산처럼 쉽게 당하지 않습니다. 남은 자들은 대부분 정예화 된 빨치산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투에서 염상진의 연락병, 강대진이 희생됩니다.

    토벌 엿새째, 토벌군도 전략을 바꿔 완전 포위작전으로 나왔습니다. 연대급으로 무리죽음을 당하는가 하면 중대가 몰살하기도 합니다. 이태식의 부대도 적진을 뚫어야 했습니다. 이태식과 다른 방향으로 가던 조원제는 포위를 뚫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해가 바뀐 52년이 되어도 토벌은 멈출 줄 몰랐습니다. 천점바구는 비상선을 찾아가다가 군인무리와 마주칩니다. 오대 육. 천점바구는 담배나 피우고 가던 길 가자고 제안합니다. 그쪽에서도 그러자고 응답합니다. 담배도 얻고 건빵까지 얻어서 헤어집니다.

    병기과 비트에서는 바깥소식을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아 이틀째 굶고 있는 김종연, 서인출, 배삼성 등이었습니다. 재생총알은 수북이 쌓인 데다 재료까지 떨어져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바깥에서는 군인 수색대가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비트 입구를 이상하게 보던 중사가 눈이 녹은 자리를 발견하고 맙니다. 바위를 굴리고 항복을 권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류탄을 던져 넣습니다. 비명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전북도당도 형편은 전남도당과 마찬가지였습니다. 26명을 한 중대로 묶어 산개하고 있었습니다. 손승호의 중대는 열사흘째 전투 중이었습니다. 이미 이레째 굶었습니다. 야간, 적의 피습이 있었습니다. 조명탄이 터지고 손승호는 정신없이 도피했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환자비트에서 휴식을 취한 손승호는 챙기지 못하고 헤어진 박난희를 생각합니다.

    박난희도 낙오된 채로 다리를 절며 산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손 동무를 외치다 피격되어 숨을 거두고 맙니다. 손승호는 제이 비상선에 도착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됩니다. 손승호와 교대한 보초가 토벌대에 제보한 탓이었습니다. 토벌공세가 끝났습니다. 병력은 삼분의 일로 줄어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충격은 도당 정치부장인 이북출신 오원식이 스물다섯 명의 부대원들을 데리고 투항한 일이었습니다.

     

    30. 각 도당과 지리산의 전면공세

    도당이 토벌군에게 당하고 있을 때, 지리산은 비교적 한가했습니다. 그들은 군인들이 남기고 간 총알을 줍거나 보급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어떤 여성대원이 오줌을 누다가 발견한 가마니 속에는 쌀이 아닌 총알이 무더기로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총알 무더기와 ‘승리의 그날까지 용감히 싸우시오.’라는 쪽지까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월 10부터 다시 지리산에 공세가 시작됩니다. 이 개 사단 병력을 각기 반씩 나눠 지리산과 도당지구를 동시에 공격하는 전면작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해룡, 김범준 등은 지난 경험을 밑바탕으로 지리산을 벗어나기로 합니다. 그러나 적들에게 걸려 좌절됩니다. 이백 명의 희생자를 내며 남원군당의 달궁골로 대피합니다. 남원군당의 트들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비행기가 귀순공작이나 삐라를 뿌리는 용도만으로 날아다니지 않았습니다. 계곡마다 네이팜탄을 퍼부었습니다. 이해룡의 부대원 다섯이 네이팜탄에 희생되고 맙니다.

    하대치의 부대가 잠복한 참호를 공격해 다섯을 생포합니다. 그들은 항복을 하면서 빨치산 친인척의 이름들을 댑니다. 군인들은 징집당해 왔기에 그 출신성분도 빨치산과 매일반이었습니다. 그들이 두고 가는 총알은 어쩌면 그런 속에 동조자들의 지원일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일월이 끝나서야 동계공세가 잦아들었습니다. 이해룡은 대원들을 절반 이상 잃었습니다. 그들은 토벌대에게도 죽었지만 얼어죽고 굶어죽기도 했던 것입니다. 각 도당과 지리산에서 동시에 실시된 이차 동계대공세가 끝난 다음, 박영발이 죽었다, 방준표가 죽었다, 김선우가 죽었다,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일종의 심리전으로 토벌대가 퍼뜨린 것이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군토벌대의 대대적인 공세로 전남북과 경남의 도당과 지리산 빨치산들이 육십 퍼센트가 넘게 죽었습니다만 이제 빨치산들은 완전무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수는 줄었지만 정예화 되었던 것입니다.

     

    31. 또 하나의 전쟁터, 포로수용소

    정하섭은 김범우에게 반공포로로 위장할 것을 조직의 이름으로 지시합니다. 포로수용소는 한국전의 특성을 그대로 안고 있었습니다. 모순이란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방군이 이북지역에서 방위군을 차출하고 인민군이 이남지역에서 의용군을 차출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은 반공과 친공 두 패로 나뉘었고 그 안에 알력 싸움은 나날이 자심해졌습니다. 당연히 미군의 명령을 받는 삼십삼연대는 노골적으로 반공의 편을 들었습니다. 밤사이 사라지는 사람, 거제 앞 바다에 떠오르는 토막 난 시체. 거제 포로수용소는 한반도 전쟁, 이념 양상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서울, 선우진은 술집에 앉아 송지운에게 신문기자나 대학교수 자리로 옮겨 달라고 조르고 있었습니다. 송지운은 마지못해 신문기자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합니다.

    월요일, 북국민학교 애국조회시간입니다. 애국가를 사절까지 다 부르고 교장의 반공훈시는 끝이 없습니다. 염상진의 아이들, 하대치의 아이들, 김복동, 서인출의 아이들은 산사람, 빨치산 이야기가 나오자 움츠러듭니다.

     

    32. 천점바구의 죽음과 동계대공세 종료

    토벌이 끝나고 이태식 부대는 산이 가까운 마을에서 보급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차피 춘궁기가 다가오는 겨울 막바지였습니다. 해서 담양까지 원정 보투를 나갑니다. 그 보투에서 민간인인지 모를 한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군토벌대의 제사차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의 공세와 달랐던 점은 빨치산 투항자 부대들이 운용된 점이었습니다. 빨치산들의 분노는 피해만큼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대치의 부대는 쫓기다가 대밭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전투는 이겼지만 제주에서 목포로 이송되었다가 탈출한 이 대대장을 잃습니다. 그 자리에 천점바구가, 천점바구의 자리에는 외서댁이 배치됩니다.

    천점바구의 대대가 사령부를 지원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던 중 총에 맞습니다. 김혜자가 그의 곁에서 함께 죽습니다. 며칠 뒤 찾아가자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로 죽어있었습니다. 이지숙은 꽃망울이 몇 개 달린 진달래 가지를 그들의 평장한 무덤 위에 놓습니다. 백 일에 걸친 군토벌대의 동계대공세가 끝났습니다. 그 기간, 전남북과 경남, 지리산에서 일만팔천여 명의 빨치산들이 죽어갔습니다.

     

    33. 오이년 오.일오 결정

    52년 3월 10일. 수도사단, 팔사단의 작전이 종료되고 그들의 임무는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와 국방군예비대로 다시 넘어갔습니다. 전남도당에 전사 최고 영예인 ‘영웅’이 두 명 탄생했습니다. 백아산지구의 이태식과 조계산지구의 하대치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춘궁기에 겹쳐 휴전회담까지 진행되고 있어 보투는 물론 초모사업(모병사업) 또한 어려워진 상태였습니다. 조원제는 한 마을에서 부대원들이 담배를 찾으려고 노인의 주머니까지 뒤지는 행위를 보고 토론을 통해 중대 전체가 담배를 끊도록 결의합니다.

    조계산지구에 경사가 있었습니다. 안창민과 이지숙이 결혼을 한 것입니다. 도당위원장 박영발이 방침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외서댁은 신부의 꽃다발을 준비하면서 천점바구와 김혜자를 생각합니다.

    안창민과 이지숙은 결혼식 후 하산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이년 오일오 결정은 산 속의 열 명 당원보다는 인민 속의 한 명의 당원이 낫다, 라는 전남도당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위장 투항을 이용해 인민 속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죠. 두 사람은 그 작전에 선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위장귀순 후, 조사를 받고 풀려나면 다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합니다.

     

    34. 제5지구당 결성

    오일오 결정은 그보다 앞서 이루어진 제5지구당 결성에 따른 조치였습니다. 지리산 빗점골에서 열린 조직위원회 회의에는 이현상, 박영발, 방준표, 김삼홍, 김선우, 조병하, 박찬봉이 성원이었습니다. 이유는 지난해 팔월 삼십일일 중앙당의 정치위원회에서 의결한 ‘94호 결정서’ 때문이었는바, 당 정치노선과 정책은 옳았으나 남조선 내의 단체들이 잘못해서 조국해방 투쟁 과정에서 당이 요구하는 수준에서 자기 임무를 수행치 못했다는 평가와 함께 당 사업 강화를 위해 종래의 행정지역에 따른 조직체를 보류하고 잠정적으로 5개 지역을 설정, 각 지구조직위원회를 조직해 일체의 당 사업을 지도토록 한다는 결정서였습니다. 5개 지역은 제1지구 서울, 경기. 2지구 울진군을 제외한 남부 강원도. 3지구 논산군을 제외한 충청남북도 전역. 4지구 경상북도와 울진군 및 낙동강 이동의 경남지역. 5지구 전남북 전역과 경남 낙동강 이서지역 및 논산군과 제주도 지역. 그 결정서는 세 가지 중대한 사항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당의 기본정책 변화, 둘째 전쟁수행 책임의 규정, 셋째 도당의 해체와 제5지구당 결성. 이현상은 결정서 수용의 입장, 박영발과 방준표는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적절한 절충안이 마련되어 시행됩니다.

    이해룡은 전쟁이 잘못된 책임을 모두 남선에 떠넘기는 처사에 분노합니다. 미군의 개입을 미리 계산하지 못한 것, 의용군 차출로 반공세력만 늘린 것, 적절한 시기 퇴각명령을 내리지 못해 고립된 인민군과 도당. 이것들은 중앙당의 과오가 아니냐고 김범준에게 따져묻습니다. 김범준은 도당위원장들은 문제 삼지 않은 ‘책임’에 대해 중간간부인 이해룡이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이 당원으로서의 차원과 인식의 높낮이에서 비롯되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결혼이 허용되자 김동혁도 애가 닳았습니다. 강경애에게 구애하느라 한바탕 난리를 일으킨 김동혁은 이틀 뒤 정찰을 나갔다가 매복조에 걸려 죽습니다. 조장이었던 강경애는 돌아와 서럽게 울었습니다.

    조원제는 일대대 지도원이면서 연대 부정치위원으로 임명받고 며칠 지나지 않아 사고를 칩니다. 배를 주려 부황기가 든 항미소년돌격대를 보고 지나치지 못한 것입니다. 농번기, 소를 잡으면 안 되는 규정을 어기고 소를 보투했던 것이죠. 그는 이 일로 견책의 심판을 받습니다.

     

    35. 현실투쟁에서 역사투쟁으로

    최익도와 유주상은 새롭게 나타난 신흥부자 염상구를 견제하고자 합니다. 최익도는 전후복구 사업으로 호황을 맞게 될 제재소를 하려고 하는데 염상구와 부딪쳤던 것이고 유주상은 떼인 논의 복수를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최익도는 세금조사로 염상구를 몰아칠 계획을 세웁니다. 한편 염상구는 제재소 사장과 솥공장을 맞바꾸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유월, 구산댁이 외손자 길남, 종남부터 친손자 남매까지 밥을 먹이고 있을 때, 야학선생이 된 이근술이 찾아옵니다. 월사금을 못내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야학을 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장 저녁부터 아이들을 야학에 보내기로 한 구산댁이었습니다.

    유월 팔일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가조인 된 소식은 빨치산에게 두 번째 큰 충격이었습니다. 오일오 결정으로 빨치산 투쟁은 부정당하는 느낌이었고 휴전은 방향을 잃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염상진은 오일오 결정에 대해 현실투쟁에서 역사투쟁의 단계로 바뀐 것이라 말합니다. 빨치산답게 용감하게 죽는 것이 앞으로 남은 오직 하나의 기회라고 말합니다. 이런 교육은 각급 부대에서 다 시행되었습니다. 빨치산들은 토론을 통해 최후까지 역사를 위해 투쟁할 결의들을 세웁니다. 역사투쟁은 결사투쟁의 다른 말이었습니다. 유언처럼 이어지는 발언들에서 휴전이 되는 마당에 북쪽에서 왜 자신들을 위한 대책을 세우지 않느냐는 말이나 당을 원망하는 말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원제는 이것이 흡족했습니다. 빨치산의 근본임무를 똑바로 알고 있다는 증거였고, 왜 죽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니까요.

     

    36. 감옥살이도 역사투쟁이다

    칠월. 염상진은 폭염 속에 안창민과 이지숙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위장귀순이 탄로난 탓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반대했던 전술이기에 아쉬움은 더 컸습니다. 염상진은 어떻게든 살려보자고 선을 대고 있었습니다. 한편 신 씨는 안 씨 문중을 찾아다니며 부탁을 하지만 모두 박절당하고 맙니다. 옛 작인들 아내들이 논을 한 마지기씩 내놓습니다.

    조원제는 팔월 오일에 실시될 정부통령선거에 대한 교란 및 저지 투쟁을 위해 잠입했다가 거점책의 배신으로 체포됩니다. 우연히 경찰서에서 학생시절부터 드나들면서 알게 되었던 박 형사를 만납니다. 박 형사가 집에 알려주겠다고 속삭입니다. 해질녘, 아버지가 찾아옵니다. 아버지는 옛날 비밀당원으로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역사 투쟁 실천에 대해 들은 아버지는 알겠다고 합니다.

    구월, 하대치는 안창민과 이지숙이 무기징역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염상진은 실망하는 하대치에게 감옥에서 투쟁이 또 하나의 역사투쟁으로 의미가 있다고 일러줍니다. 이태식은 조원제가 붙들린 것을 알고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살아서 우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속으로 당부합니다. 물오리가 벌써 돌아왔습니다.

    박두병과 손승호는 이별합니다. 박두병은 손승호의 손에 귀순증을 쥐어주었습니다. 손승호는 고향으로 돌아가 못 다한 투쟁을 이어가야할 결심을 세우며 역사투쟁을 해가야 할 자신의 책무에 대해 되씹습니다. 그러나 물을 마시고 일어나다 바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37. 겨울과 함께 떠난 영웅 이태식

    포로수용소에는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습니다. 북송될 좌익 수용자들을 찾는 면회심사가 문제였습니다. 우익진영에 좌익이 나타나면 테러를 당해 죽어야 했고 좌익진영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선별과정은 제네바협정을 무시한 행위였고 폭력을 조장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다 수용소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포로가 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사태는 새로 부임한 콜슨 준장이 미군측의 가혹행위를 시인하고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각서를 발표하면서 마무리됩니다만, 이 각서는 미군의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이 되어 새로 부임한지 닷새 만에 콜슨 준장은 경질되고 맙니다.

    후방대가 거의 무너져 총알보급투쟁을 위해 나섰던 강동기가 죽습니다. 남양댁이 남편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부짖다가 유치장에 갇힌 사이 빨치산을 일곱 명이나 잡았다고 승전행사가 화려하게 열립니다. 이태식과 같이 총알보급투쟁을 나섰던 강경애도 죽고 맙니다.

    겨울이 되자 경찰토벌대의 공세가 심해졌습니다만 군인 토벌대보다는 상대하기가 수월했습니다. 비상선에 모여 인원파악을 하면서 하대치와 외서댁은 유만복이 죽은 것을 알게 됩니다. 하대치의 부대는 밥을 먹고 야영하는 토벌대를 기습하기로 합니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하대치가 수류탄 파편에 머리를 크게 다칩니다. 빨치산들은 시나브로 소멸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김범준은 동상으로 발이 썩어 들어가 이해룡에게 업혀 다니고 있었습니다. 환자트로 보내달라고 아무리 말해도 이해룡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해 겨울 이태식의 죽음이 전해졌습니다. 자폭이라고도 했고 서로 쏜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장소도 소문이 분분했습니다. 겨울은 또 수많은 빨치산들을 데리고 갔던 것입니다. 부대개편으로 하대치는 지구 부사령관이 됩니다.

     

    38. 휴전선으로 변한 삼팔선

    53년 6월 18일 마산의 반공포로수용소에서 김범우는 풀려납니다. 그는 북송을 결정한 정하섭을 생각하며 새로운 싸움을 이곳, 남한에서 꿋꿋이 해나가리라 다짐합니다. 집에 돌아와 김범준의 소식을 들은 김범우는 놀랍니다. 형님은 끝내 염상진의 것이 되었구나, 라는 다소 유치한 생각과 함께.

    보성경찰서에서 긴급회의가 열립니다. 휴전을 앞두고 잔비소탕 명령이 떨어진 탓이었습니다. 남인태가 도경에서 받은 극비문서는 잔비들의 분포도가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였습니다. 확연히 줄어든 숫자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남에 잔비가 가장 많았습니다. 몇 가지 대책을 세운 후 회의는 끝납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됩니다. 평양방송은 팔월 칠일 박헌영 외에 이승엽, 이강국, 임화, 설정식 등 열두 사람에 대한 숙청소식을 보도합니다. 이해룡은 흥분해 남로당 계열만 숙청했다면서 김범준에게 따지고 듭니다. 김범준은 당이 인민해방을 약속하고 전쟁을 수행하며 인민의 헌신을 요구했지만 결국 완수하지 못한 책임을 선택적 결정으로 책임지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왜 박헌영이라는 말에 김범준은 나이 한 살이라도 더 많은 자가 먼저 가는 것이라 타이릅니다.

    휴전을 계기로 토벌대의 공세는 더 맹렬해집니다. 9월 20일 삐라에는 이현상의 죽음을 알리는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며칠 뒤, 이해룡과 김범준은 총에 맞아 죽습니다. 염상진도 대원 넷과 자폭하는 비장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틀 뒤 벌교역 앞마당에 염상진의 머리가 내걸립니다. 호산댁이 난동을 부립니다. 죽산댁도 가세합니다. 염상구가 나타나자 경찰이 반색을 하지만 염상구는 형의 머리를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경찰이 안 된다고 하자 염상구는 청년단과 총질이라도 하잔 말이냐며 가버리고 권병제는 난감합니다. 권 서장은 그냥 염상구가 염상진의 머리를 가져가도록 방치합니다.

    한장수는 동학농민항쟁부터 여태까지의 한스러운 세월들을 복기하며 혼자 중도방죽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틀 뒤 염상진의 상여가 나갔습니다. 무덤 자리는 율어 방면이었습니다. 며칠 뒤, 그의 무덤에 야음을 틈타 하대치 등 여섯이 나타납니다. 하대치는 끝까지 투쟁하다 염상진을 따라가리라 맹세합니다. 그림자들은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태백산맥 끝>

    참고! 태백산맥 등장인물 및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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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맥 등장 인물 정리와 가계도

    대하소설을 읽다가 가장 곤란할 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이 사람, 누구였더라? 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대하소설은 그 폭과 길이가 광범위하기 때문에 부득이 많은 등장인물이 나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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