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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

날개 - 이상

트레바리 2021. 4. 5. 18:4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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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李箱)

    서울 출생. 1910 ~ 1937. 시인이자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입니다. 보성 고보를 거쳐 경성 고등공업 건축과 졸업, 조선 총독부 내무부 건축과 기사로 근무했습니다. 그림과 시로써 출발했고 1934년 중앙일보에 <오감도> 연재, 1936년 조광에 소설 <날개>를 발표, 일약 문단에 등장합니다. 심리적인 경향이 짙은 작품을 주로 썼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에 <오감도>, <거울>, 단편에 <봉별기>, <종생기> 등 소설, 수필, 평론 등 80여 편이 있습니다.

     

    날개는 해석하자면 다소 난해한 소설입니다. 일인칭 시점에서만 서술하기 때문에 다른 표피를 살펴볼 수가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지요. 상상력이 다소 필요한 부분이지만 이럴 땐 부득이 맞을까, 맞지 않을까,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공인된 평론가도 아니고 그 어떤 권위도 가지지 못했으니까요.

    줄거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아내와 나는 한 집에 삽니다. 장지문이 가로놓인 채 아내의 방은 바깥방, 내 방은 안쪽 방입니다. 아내의 방엔 늘 손님이 옵니다. 나는 내 방에 처박혀 있습니다. 아내는 매일 내 머리맡에 돈을 놓아둡니다. 몸이 약한 내가 외출을 합니다. 돌아와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봅니다. 아내는 내게 아스피린이라고 약을 먹입니다. 아내가 외출하고 아내의 방을 뒤적거리며 놀다가 아내가 준 약이 최면약인 아달린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아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산에 올라 남은 아달린을 모조리 삼키고 하루 주야를 잠에 빠져버립니다. 집에 들어가 또 못 볼 꼴을 보고 아내에게 야단까지 맞습니다. 정오의 사이렌이 울릴 때 문득 겨드랑이가 가렵다고 느낍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날개는 십대에 읽었을 때와 사십을 한참 넘긴 지금 읽었을 때, 그 느낌이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작품은 흔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는 난해하다기보다 예나 지금이나 이 사람, 왜 이럴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게 정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보통 우리는 일제강점기시절의 작품들을 읽을 때 자간이나 행간에서 어떻게든 저항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이는 주입식 교육이 우리에게 심은 바랭이 씨앗과도 같은 것입니다. 일단의 허무주의와 자기 파괴적인 경향마저도 저항의 의미로 내세우기도 합니다. 기실 이런 경향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지식인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들이 자기 내면에 침잠해 외부적으로 어떤 영향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대로 두고 역사적인 평가를 해야 하며, 이는 문학적인 평가와 분리해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소견입니다.

    소설 날개에 대한 평론을 보면 대부분이 식민지 지식인의 무력감 따위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에 얼마나 동의하시는지요? 저는 그다지 와 닿는 바가 없었습니다. 매음을 하는 아내와 그에 기생하는 기둥서방의 관계에서 식민지 지식인의 비애라든가 무력감이 왜 느껴져야 하는 것일까요? 작가가 그렇다면 경제적인 혜택을 주는 아내를 일제에 비유한 것일까, 아니면 아내를 탐하고 돈을 내는 손님을 일제로? 무력감에 빠진 주인공은 우리 민족? 어떻게 보아도 의미가 와 닿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 시기에도 뚜렷이 저항문학을 써온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런 시대에는 붓보다 총이라며 붓을 꺾고 숫제 무장투쟁을 떠난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파편화된 현대인의 외로움, 혹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자아를 분리시켜 버린 한 인간의 의식세계. 이런 말이 더욱 어울리지 않을까 합니다.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필자는 이상의 날개를 보면서 그다지 화려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날갯짓을 그리워하는, 그러니까 자기 이상과 분리되어 괴로워하는 처절하게 개인주의적인 한 인간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작가의 어떤 문학적 실험정신, 새로운 경향의 제시는 물론 인정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서구사조의 영향일 뿐, 완전히 독창적인 세계의 창조도 아닙니다.

    일제 시기는 우리 민족의 수난시기입니다. 이상 같은 엘리트가 자기 속으로 침잠해 존재를 고민하고 있을 때 죽어간 독립투사, 핍박 받던 민중이 분명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충분히 평가 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더해 우리의 일제강점기 문학사가 이렇게 왜소한 것은 민족분단에 의한 이념편향 탓입니다. 진영을 떠나 한민족으로서 좌우를 막론하고 함께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시절이 하루 빨리 왔으면 합니다.

    그것이 진짜 우리가 다시 한 번 날 수 있는 길이란 생각을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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