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 / / 2024. 2. 20. 14:10

채식주의자 줄거리, 작가 한강 그리고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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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를 읽기 전에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등 총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연작 단편으로 따로따로 발표한 것을 모은 것이 채식주의자라는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된 것이다. 이야기는 계속 연결되지만 세 개의 산문 서술방식은 상이하다. 첫 번째 장, 채식주의자의 서술방식은 1인칭 시점이다. 서사의 중심이 되는 영혜를 남편이 관찰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두 번째, 몽고반점은 3인칭으로 서술하는데, 처제인 영혜를 바라보는 형부를 전지적으로 관찰한다. 세 번째인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 즉 김인혜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나무 불꽃 장은 다른 장보다 조금 더 상세하게 줄거리를 썼다. 다소 몽환적이고 기이해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에 알맞은 당위성을 부여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 작가 '한강'

채식주의자 작가 한강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가,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재직 중이다. 이 채식주의자는 한강에게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 줄거리

채식주의자

그저 평범했던 아내, 영혜가 어느날 갑자기 냉장고 속 모든 육류를 내다 버리면서 육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꿈속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고기를 먹는 끔찍한 꿈을 계속 꾸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편인 '나'는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회사 상사들과의 부부동반 회식자리에서도 채소만 꾸역꾸역 먹으며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는 것까지도 참을 만했다. 그러나 계속 야위어만 가는 아내 때문에 처가에 도움을 요청한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던 장인은 영혜에게 억지로 탕수육을 먹이려다 뜻 대로 되지 않자, 영혜의 뺨을 때린다. 영혜는 과도로 손목을 긋고 형부에게 업혀 응급실로 간다. 그녀는 병원에서도 의식을 되찾자마자 웃옷을 벗고 햇볕을 쬐다가 손목에서 배어 나온 자신의 피를 핥는 기행을 보인다.

몽고반점

영혜의 자해가 있고 2년이 흐른 시점. 남편과 이혼한 그녀는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의 형부인 그는 비디오 아티스트다. 지나가는 말로 아내가 영혜의 몽고반점 이야기를 하자, 왠지 모를 강렬한 영감과 열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영혜에게 부탁해 보디페인팅으로 온몸에 꽃을 그리고 누드촬영을 하게 된다. 후배를 파트너로 섭외해 함께 촬영을 시작하지만 그의 무리한 부탁에 후배는 촬영을 거부하고 돌아가버린다. 그는 망설이다가 대학시절의 연인에게 찾아가 자신의 스케치를 보여주며 제 몸에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다시 영혜를 찾아간 그는 바로 그녀와 섹스부터 한다. 그 후 본격적으로 캠코더를 켜놓고 촬영하다 또다시 몸을 섞는다.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고, 잠에서 깬 그는 캠코더가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집안을 살피던 그의 눈에 문득 식탁에 엎드린 아내가 들어온다. 아내는 이미 작품을 보았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동생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며 분노했다. 그러는 사이, 영혜가 일어나 벌거벗은 채로 베란다에 나가 다리를 벌렸다. 아내가 부른 구급차 소리와 아이들 소리, 비명소리가 한데 엉켜 시끄러워졌다.

나무 불꽃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영혜의 언니, 인혜는 그녀가 입원한 정신병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먼 숲을 보며 석 달 전 병동에서 사라졌다가 비 내리는 숲에서 발견된 영혜를 떠올렸다. 영혜는 인혜와 네 살 터울의 동생으로 손이 거친 아버지로 인해 어려서부터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아이였다.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인혜의 가게에서였다. 그는 너무나 지쳐 보였고, 그런 그에게 점심은 먹었냐고 물은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결혼을 하고도 인혜는 늘 지쳐 보이는 그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그는 늘 지쳐 보였다. 그러나 전시회 작품을 보면서 인혜는 놀란다. 작품에서는 그의 넘쳐나는 에너지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간극은 인혜와 지우(아들)를 외롭게 했다.

육아와 고민에 지친 인혜는 악몽까지 더러 꾸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남편의 행동을 따라 해 보면서 이따금 그가 이해되기도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지난 일들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남편과 영혜가 찍었던 날을 복기해 본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영혜와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다 붙들린 남편. 병원에서 정상으로 판명된 남편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가 수개월의 소송과 지루한 구명운동 끝에 풀려나 잠적했다. 그러나 영혜는 폐쇄병동에서 나오지 못했다. 영혜의 이상행동은 여전했고, 부모님은 영혜도 인혜도 보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충격적인 일을 겪었어도 인혜의 일상은 검질기게 이어졌다. 영혜의 발자과 상태 악화가 없었다면 계속되었으리라. 영혜는 이제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링거마저 맞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결국 코로 호스를 꽂을 거라는 말을 들으며 영혜의 병실로 가던 인혜는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영혜는 이제 자신은 음식을 안 먹어도 된다고 했다. 그녀는 모든 나무는 사실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다고 말하며 꿈에서 자신이 그렇게 하면 몸에서 잎사귀가 돋고 손에서는 뿌리가 난다고 했다. 영혜는 이제 스스로 내장이 다 퇴화하고 더 이상 동물이 아니게 되었다고 믿었다. 인혜가 식물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을 하냐고 반문하자, 이제 그것도 곧 사라질 거라 답할 뿐이었다. 죽으려는 거냐는 윽박에 영혜는 의아한 한 표정으로 왜 죽으면 안 되는 거냐고 되물었다.

이년 전 사월, 그 비디오가 만들어졌던 해의 봄, 인혜는 한달 가까이 하혈을 했다. 진찰을 미루며 죽음을 상기한 그녀가 생생하게 의식한 것은 남편과 함께 살아온,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자신이 선택한 그 시간들이었다. 병원으로 향하며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간단한 시술로 별일 없이 더 살아갈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외려 좌절감을 느끼는 인혜. 그간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게다. 인혜는 언뜻  동생의 행동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영혜는 이미 통과했을지도 모른다. 

인혜는 영혜에게 코로 고무튜브를 삽입하는 시술이 실패하자, 큰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그녀를 이송하는 구급차에 함께 올랐다. 인혜는 이제 남편과 영혜가 얽혀 있던 모습이 성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차라리 그들의 몸짓은 사람에서 벗어 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냥 꿈이야.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 나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먼저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인혜는 영혜에게 속삭인다. 이건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고.

채식주의자 표지 및 띠지

채식주의자 독후감

상당히 심오한, 아니 차라리 심각한 주제를 은유적으로 다루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된 주인공은 김영혜라는 인물이다. 각 장은 그녀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주관적 경험이라 볼 수 있겠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기란 곤란하다. 이는 어떤 억압, 틀 지워진 어떤 체계 -그것이 문화든, 국가든, 남성이든- 그 자체를 거부하는 영혜의 몸부림이 너무나 전방위적이어서 딱 잘라 이것이다 말하기 어려운 점에서 기인하는 문제다. 결국 영혜가 채식마저 거부하고 마는 이야기의 흐름은 실제 어떤 '주의'도 붙이지 말라는 작가의 경고가 아닐까 모르겠다. 그런 틀 지우는 것 자체가 억압이고 폭력이라는 웅변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사회와 이념과 철학 따위와 관계하게 되고 이런 관계가 자의로든 타의로든 발생하고 나면 그것은 하나의 울이 되어 다시 넘기 힘들어진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친절하게 '우리'라는 정감 있는 호칭을 붙여 집단의식을 심어주고 그것의 끈적임은 바닥이 닿지 않는 늪처럼 사람을 빨아 당기는 힘이 있다. 이런 것은 예의, 관례, 도덕, 종교, 규칙, 법, 전통 따위의 무수한 변주로 때로 아프게, 때론 은근히 스미어 한 개인을 옭아맨다.

작품에서 영혜가 처음 거부한 것은 육식이다. 육식은 가장 폭력적인 방식의 착취다. 영혜는 자신을 문 개가 아버지에게 잔인하게 죽임당해 잡아먹혔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나름의 부정을 보인 아버지이나, 그 아버지는 영혜를 학대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 영혜는 자신 또한 오토바이 뒤에 묶여 끌려다니는 개 신세는 아닌가, 의심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묶어서 끌고 가는 어떤 윤리적 밧줄, 관습적인 밧줄을 끊어내려한 첫 시도가 바로 육식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도덕적 관습도, 의무, 그러니까 생존을 위한 본능적 의무까지도 저버리고 스스로를 나무라 생각하며 인간 종의 영역까지 파괴, 혹은 돌파하고 만다. 이 정도 경지면 가히 해탈이 아닐까 싶다. 뛰어난 근기를 가진 영민한 사람이 문득 인생사의 허무함을 깨닫고 출가를 감행해 대각을 이룬다면 그 개인에게는 충분히 축복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와 복잡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야기는 좀 복잡해진다. 형부와 인혜의 이야기는 그런 시점이다. 우리가 부처를 보고 제 각각 다른 느낌과 심상, 깨달음을 얻듯이, 형부는 그녀를 통해 금기를 넘음으로써 어떤 틀을 파괴했고, 언니인 인혜는 자신이 허위의 삶을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물론 그런 과정에는 극심한 통증이 동반된다. 

사실 이 소설은 실제 문장을 꼭 접해보아야 한다. 구성과 아름다운 문장은 어떻게 살을 발라낼 게 없는 작품이다. 쉽지 않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참 잘 전달했다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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