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시 / / 2019. 10. 20. 12:18

허수경-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728x90
반응형
시인이 가자, 오래도록 묵혀 두었던 시집이 떠올랐다. 첫 권은 대학 동문, 누군가에게 줘버렸고 두 번째 권은 생일선물로 사서 줬고 세 번째 권도 또 누군가 주고도 그 어떤 미련이 남아 한 권을 더 산 시집. 이것도 어쩌면 진주에 사느라 가끔 들른 진주문고의 살뜰함 덕분이 아닌가, 한다. 보통 한 시집이 수 년간 한 서점을 지키기란 쉽잖은 일이다. 지역출신 문인에 대한 애틋함이 느껴졌던, 그리고 동문선배에게 자랑스러움도 함께 느껴졌던 십여 년 전 어느날의 기억.

나는 이 시집을 다시 우연하게 만났고 다시 집어듦으로써 오늘의 해우를 필연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작년, 허수경 시인이 가셨다. 스무살 남짓 어린 시절에 쓴 첫 시집을 네 권이나 사고 읽는 동안, 스무살이었던 나 또한 사십줄을 넘었으나 아직도 허수경의 시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시인은 다시는 말 할 수 없고, 글 쓸 수도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지독한 가시내.

먼리 만리타향, 독일서 꿋꿋이 받아들였다는 시인의 죽음에 내가 씹어뱉듯 웅얼거린 말. 어쩌면 이십대 초반, 무례하게도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처음 읽으면서도 비슷한 말을 중얼거렸을 게다. 지독하도록 검질긴 통증을 그 애띤 선배의 시집에서 느낀 것이다.

구수한 말맛 속에 배긴 손맛은 쩍쩍 갈라진 손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배여나오는 피맛 같은 느낌. 어릴 땐 도무지 삼킬 수가 없던 개장국 맛이었을 것 같기도.

탈상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 말릴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허수경.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시집의 제목이 잠시 나타난 시, 탈상의 전문이다.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는 '단칸방', '폐병쟁이 내 사내', '사식을 먹으며' 등이 있다.

시어의 말맛을 보는데 무슨 긴 사설이 필요할까? 읽고 곱씹으면서 눈 한번 지그시 감으면 되리라.

허수경 시인의 시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가을 나들이에 손끝에, 혹은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나가 조금은 쌀쌀한 그늘 벤치에 앉아 까먹기 딱 좋은 도시락 같은 시집이다.

삼가 시인 허수경 선배님의 평안한 안식을 기도한다.

반응형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