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고전이 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의 독서 감상문을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작품이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지는 위상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그러하기에 이미 훌륭한 평론들이 너무나 많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 소설에 대해 쓰지 않을 수도 없는 이유 또한 분명히 있다. 짝사랑 같은 열병이다. 이십 대에 만난 이 작품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난장이를 생각하며 가슴 한켠을 쓰려했던 기억 때문이다. 난쏘공은 70년대 출판된 이후 백만 부 발간이 넘은, 이 시대의 고전이 된 소설집의 제목이자, 이 소설집에 실린 12편의 난장이 연작 중, 한 단편의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들은 각 단편에 따라 1인칭 주인공의 시점과 3인칭 시점을 넘나들며 한정된 등장인물들이 유기적..
루쉰의 작품은 이번 고향이란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만하려 한다. 그동안 아큐정전, 광인일기, 풍파를 잇따라 분석해 보았는데 짧은 소견으로 대가의 위엄에 누를 끼친 것은 아닌 지, 적잖이 우려된다. 해서 당분간 루쉰의 작품은 손 떼기로 한다. 사실 루쉰의 작품 몇 가지를 분석하면서 필자 스스로도 골치가 꽤 아팠다. 루쉰은 중국현대사의 격변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격변기라는 것은 사회 문화, 제도적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강의 아랫물에 사는 물고기가 심산 협곡의 격류를 제대로 알 리가 없다. 한 가지 다짐할 것이 있다면 훗날 중국근현대사를 공부할 기회가 있어, 앞서 썼던 글이나 오늘 쓰는 이 글에 첨삭할 것이 생긴다면 꼭 그렇게 하겠노라는 것이다. 사설이 꽤 길었다. 이제 오늘 살펴볼 고향이라는 작품을 본격..
아큐정전과 광인일기가 전형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중국사회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낸 무거운 작품이라면 풍파는 앞의 두 작품에 비해서는 일반적인 인물이 등장하면서 갈등 또한 나름 가볍게 마무름 되어 한결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풍파는 당시 중국인들의 어리석음을 가벼운 사건 하나로 짚으면서 여전히 폐습에 찌든 사람들의 군상을 고발한다. 풍파는 1920년 작품이다.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여덟 해가 지난 시점에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저 한적하고 목가적으로 보이는 강변마을이 이 소설의 유일한 무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몸무게에 따라 이름을 짓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노파는 구근이다. 태어날 때, 아홉 근이 나갔던 모양이다. 손자는 칠근, 증손녀는 육근, 이런 식이다. 구근은 계속 살아가는 ..

광인일기 줄거리, 감상 이 작품은 어떤 광인, 즉 정신이상자가 쓴 일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형식으로 쓴 독특한 서사구조의 소설이다. 광인일기는 짧은 단편소설이지만, 루쉰의 첫 소설이자 중국의 첫 번째 현대 백화문 소설로 그 의의가 대단한 작품이다. 월간 '신청년' 4권 5호에 발표되었다.(위키백과) 백화문은 쉽게 말해 구어체를 뜻한다. 고백컨대, 필자는 광인일기란 이 짧은 단편을 이해하기 위해 광인일기 전문보다 더 많은 활자들을 씹어서 소화해야 했다. 몇몇 신문기사, 논고, 블로그, 특히 위키백과가 광인일기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돌아와서, 광인일기는 30년 동안 어둠 속에 있던 광인이 밝은 달을 본 이야기로 시작한다. 밝은 달을 보고서 광인의 광기가 시작되는 것은 많은..
아큐정전-루쉰 루쉰(19881~1936)은 중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삶을 살다 간 중국의 대표적 소설가다. 러일전쟁이 조선반도에서 한창이던 1900년대 초, 일본에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건너갔다가 중국의 근대화, 인민의 정신개조를 위해서는 문화운동, 곧 문학을 해야한다는 깨달음에, 의학공부를 포기하고 문학의 길을 걷게 된다. 루쉰이 살던 시대는 청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1911)이 일어난 시기였고, 일본군국주의와 열강들의 팽창주의가 동아시아를 점점 전쟁의 구렁텅이로 빠뜨려 가던 극심한 혼돈의 시기였다. 이른바 새로운 국제적 질서가 세워지는 시기였다. 아시아의 봉건국가들도 이 시기, 근대화의 과정을 뼈 아프게 겪게 된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숱한 선구자들의 자기 각성과 구상이 격류처럼 부딪치고 또는..

아내가 사서 읽고, 책장에 꽂아 둔 책이었다. 소개 받기로, 꽤 문제작이란 얘길 들었다. 처음 아내가 권하던 때, 읽으려다 관두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거개의 기득권에게 불편한 일이다. 페미니즘이 분할한 개념에서 나는 부정할 수 없는 기득권이다. 해서 피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러나 때론 흐름을 바라보며 전환의 시간이 필요함을 느낄 때가 온다. 알고 실천하던 것들에 문득, 시혜의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지난 주말이 그랬다. 아내가 저녁 식사 약속이 있어 모처럼 나가고, 21개월, 막내를 혼자 돌보면서 그런 생각이 순간 든 것이다. ‘내가 요즘은 첫 째 때하곤 다르게 좀 잘 해주는 편이지…….’ 이런 생각을 하곤 잠시 후, 소스라치게 놀랐다. 민주노동당시절, 성평등 교육을 받았고 나름대로 많이 깨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