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 / / 2019. 11. 16. 09:34

프란츠 카프카 - 변신 줄거리와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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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줄거리

'그레고르 잠자'는 아침에 깨어났을 때, 자신이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변신한 그레고르의 가장 큰 걱정은 회사출근 걱정이다. 아침이면 으레 돌아오는 반복된 일상이었으니 그러했을 것이다. 회사 지배인이 출근하지 않은 직원을 찾으러 오는 장면은 조금 충격적이다. 어쨌든 그렇게 소동이 일어나고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어 식구들과 살게 되었다. 그레고르의 경제력에 기대어 살고 있던 식구들은 이제 제각각 일을 시작하고 그레고르는 조금씩 소외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레고르가 자신의 방을 치우는 것에 자신이 인간이었던 기억까지 잊혀질까 저항하다,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고 등에 박히는 사고가 생긴다.
점점 사람들은 무관심해지다 못해 귀찮아하고, 어쩌다 마주하면 혐오를 드러냈다. 어느날 그레고르가 하숙인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여동생에게 무심코 다가가다가 하숙하던 사람들에게 들키고는 방에 갇히게 된다. 등에 박혀 썩어버린 사과와 그 주변의 염증 부위가 먼지로 뒤덮여 있지만 느낄 수 없었다. 그레고르는 끝내 쓸쓸히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죽자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셋은 모처럼 외출해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일까?

단순히 활자만 읽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 어안이 벙벙할 내용이다. 카프카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의 독해력이 모자란 것일까? 우선 이 소설의 탄생 배경을 좀 알아야 하겠다.

★Franz Kafka(1883.07.03~1924.06.03)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태어나 폐결핵으로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사십일 년간 프라하를 떠나지 않았다. 샤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 받았다. 

★실존주의(=탈존주의-강신주 주장)
인간정신을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주체성이 진리임을 강조하는 철학사조.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기 때문에(즉 인간은 인간이란 개념으로 정의되기 전,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사조다.  

★실존주의 문학
합리주의적 관념론, 실증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문예사조로 인간의 실존주의적인 측면, 즉 개인으로서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한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주체적인 실존을 중요시하는 철학이다. 그래서 인간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실존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주를 이루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고찰에서 나아가면 주체의 실존을 위협하는 획일화, 혹은 부조리한 일체의 체제에 저항하는 이념이 되기도 한다. 때로 이런 저항은 극단적인 자유주의, 무정부주의로 흐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실존주의는 68혁명의 주된 이념이었다. 68혁명은 인간의 실존을 뿌리까지 흔드는 전쟁을 반대하고, 개인에 대한 억압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극단의 자유주의 문화, 히피문화 등을 전파하며 전세계를 휩쓸었다. 일종의 인본주의적 철학으로써 보편적 인권문화, 개인주의 등을 확산시킨 철학사조다.
이에 비교되는 개념으로 구조주의가 있다. 구조주의는 기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유교 사회에서 여성이며 노비로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자. 그녀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자유의지는 한낱 몽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레고르는 출장 영업사원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고 기계처럼 일할 것을 요구한다. 특히, 이 작품이 쓰여진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이 극에 달하고 있었던 시기다. 당시는 도태된, 경제적 노동력이 될 수 없는 사람이 벌레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시대다.
갑충으로 변신은 그레고르라는 한 영업노동자가 경제력을 잃는 상징이다. 변신으로 인해 인간이 만든 구조에서 일정부분 벗어나게 된 주인공.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그레고르, 그리고 주변 인물들은 인간실존이 처한 문제에,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었지만 인간으로서 마음은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본질은 가지고 있지만 벌레의 몸에 응당 말할 수 없는 입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처음 변신했을 때부터 일정 시간, 주인공과 가족의 유대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차츰, 벌레로 변태한 아들이자 오빠는 가족들에게 커다란 부담이 된다. 이런 심리의 묘사는 그레고르의 입장에서 대단히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가족을 관찰하는 시점은 이 가족이 사는 집을 일종의 실험공간으로 느끼게 한다. 
가족관계나 어떤 사회체제가 영원불멸한 것, 인간의 존재에 선행된 것이라면 그레고르의 변신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유대, 가족관계란 이토록 가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임을 변신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인간, 개인을 억압하는 구조, 곧 가족내에서 아들이라는 위치, 경제적 가장이라는 책임, 이런 것들은 사실 허구 위에 쌓여진 부조리한 착취구조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허구는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면서 가볍게 무너진다. 가장 믿었던 여동생마저 그를 포기하고 버린다. 본질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부조리한 관계들, 사회구조들, 왜 용인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더 자유롭게 사회를 구성하고 인간의 본질을 돋보이게 하는 세상은 불가능한가? 카프카는 그레그로를 벌레로 만들어 극단적인 모의실험을 통해 이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든 문학작품은 독립된 개체로 활동한다. 따라서 대면하는 주체가 가지는 입장과 느낌이 그 문학의 개별 주관적 가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분석이 옳다 그르다,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설명에 논리적 모순만 없다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필자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사실 실존주의라는 틀에 딱 갇혀 있었다. 카프카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던 탓이다. 그래서 실존주의적 입장으로 작품을 보고 카프카의 의도를 예측해 본 것이다. 내용은 비교적 평이하다. 왜 변신했느냐는 것만 따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꼭 직접 대면해 보시길 바란다. 그레고르라는 벌레에 어떤 느낌이 투영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본인이 직접 만나보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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