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일출 없는 새벽 정하섭은 새벽 야음을 타고 벌교로 잠입합니다. 외딴 폐허가 된 현부자네 제각에 딸린 무당 월녀의 집에 찾아가 소화를 만납니다. 정하섭과 소화는 어린 시절부터 인연이 깊었습니다. 벌교에서 양조장을 하는 하섭의 아버지는 굿을 즐겨 벌이는 편이었기에 자주 마주쳤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비파를 건네며 맺은 인연은 자라서도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소화는 무당의 딸인 자신에게 다정하고 반듯하게 생긴 정하섭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당의 명령에 따라 벌교에 자금을 확보하러 온 하섭의 손 위에 무당인 소화가 손을 포갭니다. 2. 가슴으로 이어진 물줄기 밤, 하대치의 집에서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됩니다. 하대치는 이날 집을 떠나기 위해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합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

북로구라는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제일 기피했던 것이 장편소설입니다. 한 편, 한 편 써서 내용을 채워나가는 것이 블로그 운영의 거의 전부라고 한다면 제 블로그의 특성상 장편소설은 그야말로 양날의 검입니다. 많은 내용이 있으니 한 작품으로 여러 개의 포스팅을 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너무 늘어지게 되는 단점이 있지요. 게다가 장편소설은 분석하기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하지만 건드리지 않을 수 없는 작품에 이르고야 말았네요. 다가올 4.3항쟁 추념일에 맞춰 여순항쟁(여순반란)과 한국전쟁 기간-통칭 해방기 공간-을 다룬 작품을 블로깅하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완독이야 오래 전에 했지만 기억이 희미할 만큼이나 지난 세월입니다. 다시금 꼼꼼히 읽으며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최대..

소설은 다소 옛 문체라 읽어내기가 그렇게 매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일제시대 1937년 조선일보에서 연재한 소설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죠. 하지만 옛날 극장에서 변사가 말하는 것을 듯는 느낌으로 읽으신다면 나름의 재미도 느끼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참고로, 필자는 생각보다 꽤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소설은 해왕좌, 라는 연극단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연극단 단장이 살해당하면서 사건이 전개되지요. 재미 있는 것은 이런 살인상황을 유불란이라는 추리소설가가 극화하면서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잡아나간다는 독특한 설정이란 점입니다. 유불란이 범인으로 지목하는 남자에게 극에 출현할 것을 제안합니다. 남자는 고민 끝에 수락의 편지를 보냅니다. 연극이 몇 회 상연되면서 경성은 이 사건과 극에 관심이..

영달은 막일 판을 찾아 전전하는 일당 노동자다. 겨울, 하던 일이 끝날무렵, 하숙집 아낙과 붙어먹다가 남편에게 들켜 아침 댓바람에 도망쳤다. 갈 곳이 딱히 없어 길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쯤, 길을 가던 정 씨를 만난다. 정 씨 또한 영달과 같은 막노동 판에서 일했던 사람으로 서로는 앞면이 있었다. 정 씨는 능청스럽게 영달에게 아침부터 덕분에 좋은 구경했다고, 영달과 붙어먹었던 청주댁이 남편에게 죽도록 맞는 것을 보았다고 전한다.영달은 삼포로 간다는 정씨를 무작정 따라나선다. 갈 곳이 없었던 탓이다. 가난한 그들은 버스를 타지 않고 기차역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찬샘골이란 마을에 이르러 ‘서울집’이라는 대폿집겸 국밥집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아침에 도망친 술집 작부, 백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뚱보 주..

임진년(1592년)에 시작된 왜란은 조선수군의 선전과 명군의 개입으로 1여 년 만에 교착상태에 빠진다. 임진년 이듬해 음력 4월부터 왜군이, 이후 음력 8월부터는 명에서 화의를 추진하게 된다. 지난한 협상은 3년을 끌다가 결렬되고 일본이 다시 쳐들어오면서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휴전이 진행될 당시, 선조와 조정의 출정명령을 계속해서 반려한 이순신은 결국 정유년 2월 통제사직에서 해임,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양으로 압송된다. 압송되어 고초를 겪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내려온 이순신은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1597년 음력 7월 16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 수군은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른다. 이 일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조선 정부는 12..

상상해 보자. 요즘과 아주 비슷하다. 전염병이 퍼진다. 이 전염병은 코로나19보다 더 강한 전염력을 지녔고 더 치명적이다. 이 병은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의 말에 따르면 앞이 하얗게만 보인다고 한다. 주제 사마라구의 환상적인 리얼리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다소 황당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어느 날 차를 몰고 가던 남자가 갑자기 눈이 먼다. 그를 집에 데려다주고 그의 차를 훔쳐 달아난 도둑도, 그의 아내도 다 눈이 멀어간다. 걷잡을 수 없이 이 질환은 퍼져나간다. 정부당국에서는 수백 명의 이 질환자들을 한 정신병원에 수용하기로 한다. 전염력이 너무 강해 군인들이 그들을 감시한다. 군인들이 보초를 서는 쪽으로 다가오기만 해도 발포로 이어졌다. 장님이 된다는 것은 그만..